<250> 신기질, 금나라에 격렬히 저항한 남송 우국시인
2020년 09월 22일(화) 00:00 가가
신기질(辛棄疾, 1140~1207)의 자는 유안(幼安)이고 호는 가헌(稼軒)으로 산동성 제남 역성 사람이다. 사(詞)의 대가로 유영, 주방언, 강기와 함께 사대사인(四大詞人)으로 불린다.
남송 고종 소흥 10년(1140)에 태어났는데 조부 신찬과 부친 신문욱 모두 높은 관직을 역임했다. 1127년 정강지변으로 북송의 수도 개봉이 금군에 유린되고 북송 왕조가 붕괴되었지만 그들은 신종하지 않았다. 문화 한족의 강한 자긍심을 지켰다. 신기질은 우국우민의 가정 분위기에서 성장하면서 강인한 반오랑캐 정서와 태도가 형성되었다. 남송은 금과의 화약을 통해 평화를 유지했다. 한마디로 돈으로 평화를 산셈이다. 정치적·군사적으로 무능한 남송 정권에서 신기질의 비판 정신과 항금 의지는 더욱 깊어갔다. 고종 소흥말 경경(耿京)의 항금병(杭金兵)에 들어가 금군과 여러 차례 싸웠다. 자신이 이끈 2천명의 군대를 경경이 이끄는 충의군(忠義軍) 휘하로 합치고 스스로 지휘자 대신 하급 직급인 서기 역할을 기꺼이 수행했다.
신기질의 설득으로 경경은 남송 조정에 귀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경경의 부장인 장안국이 쿠데타를 일으켜 경경을 죽이고 금나라에 투항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신기질은 분기탱천해 충의군을 이끌고 장안국과 금나라 장수의 회식 자리를 급습해 장안국을 체포해 남송 조정에 넘겼다. 장안국은 처형되었다. 그의 기상과 의기가 이토록 굳건했다. 그러나 남송 정권은 주화파의 거두인 재상 진회가 장악하고 있어 대금 화평 기조를 깰 수 없었다. 수도인 임안 대신에 주로 지방관으로 근무토록 함으로써 중앙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을 최소화하였다. 저주지주 때에는 세금을 낮추고 유민들을 모아 민병과 둔전을 경작토록 하였다. 이후 담주지주 겸 호남안무사, 복주지주 겸 복건안무사 직을 역임했다. 간관의 탄핵으로 연산에 머무르기도 했다. 진강과 융흥 지부를 거쳤다. 은퇴 생활 중 추밀도승지에 임명되었지만 병사했다. 금과의 전쟁을 앞두고 대금 강경론자인 그의 명성을 이용하려는 의도였다. 조정으로부터 충민(忠民)의 시호를 하사받았다.
노년에는 강서 상요에 은거해 가헌이라는 별장을 지어 은거했다. 그의 호는 이를 딴 것이다. 상요에 거주하면서 20여년에 걸쳐 많은 시와 사를 지었다. 우국시인 육유와 성리학자 주희와도 교류하면서 유유자적의 삶을 영위했다. 사는 만당(晩唐) 무렵 문인들의 관심을 받았고 5대 시대 남당의 군주인 이욱에 이르러 크게 발전하였다. 북송의 소식은 강서시파의 중심 인물로 송사의 품격과 깊이를 한단계 끌어올렸다. 신기질은 소식의 창작기법을 계승해 둘을 소신(蘇辛)으로 부르기도 한다. 둘은 호방파(豪放派)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는 남송 호방파의 제1인자로 평가받는다. 남송 시대의 정서를 반영해 사에는 강하고 처량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65세때 지은 대표작인 영우락(永遇樂)은 험난한 시대를 사는 사대부의 한과 의지를 잘 보여준다. “천고의 세월에 강산은 의구한테 영웅은 어디갔나. 옛날 손권이 도모하던 곳은 어디인가.”(千古江山 英雄無覓 孫仲謨處). 누구에게 물을건가. 염파장군 늙었지만 아직 건재한지를(憑誰問廉頗老矣 尙能飯否). 추노아(醜奴兒)라는 사에서도 근심과 애환속에서 스스로의 삶을 관조하는 자세를 잘 표현하고 있다. “어릴 때에는 근심 뜻도 모른채 즐겨 높은 누대에 올랐었네. 이제 근심 뜻을 알기에 입에 올리려다 그만두었네. 입에 올리기를 그만두고는 쾌청한 가을이라고 말하네.”
남송의 사는 북송의 사와는 시대적 상황이 다른 관계로 표현에 차이가 발견된다. 상대적으로 번영과 안정을 누린 북송의 사가 안락함과 여유를 강조했다면 남송의 사는 불안과 걱정 그리고 쫓기는 마음을 빈번히 표현하고 있다. 북송의 시인 이청조와 신기질은 제남 출신의 동향인이다. 이청조의 사가 신기질로 넘어오면서 북송과 남송의 사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신기질은 오랑캐에 격렬히 저항한 무장의 삶과 저항 시인의 삶을 동시에 살았다. 그의 작품에서 문과 무, 저항과 은일의 조화를 느껴볼 수 있다.
남송 고종 소흥 10년(1140)에 태어났는데 조부 신찬과 부친 신문욱 모두 높은 관직을 역임했다. 1127년 정강지변으로 북송의 수도 개봉이 금군에 유린되고 북송 왕조가 붕괴되었지만 그들은 신종하지 않았다. 문화 한족의 강한 자긍심을 지켰다. 신기질은 우국우민의 가정 분위기에서 성장하면서 강인한 반오랑캐 정서와 태도가 형성되었다. 남송은 금과의 화약을 통해 평화를 유지했다. 한마디로 돈으로 평화를 산셈이다. 정치적·군사적으로 무능한 남송 정권에서 신기질의 비판 정신과 항금 의지는 더욱 깊어갔다. 고종 소흥말 경경(耿京)의 항금병(杭金兵)에 들어가 금군과 여러 차례 싸웠다. 자신이 이끈 2천명의 군대를 경경이 이끄는 충의군(忠義軍) 휘하로 합치고 스스로 지휘자 대신 하급 직급인 서기 역할을 기꺼이 수행했다.
65세때 지은 대표작인 영우락(永遇樂)은 험난한 시대를 사는 사대부의 한과 의지를 잘 보여준다. “천고의 세월에 강산은 의구한테 영웅은 어디갔나. 옛날 손권이 도모하던 곳은 어디인가.”(千古江山 英雄無覓 孫仲謨處). 누구에게 물을건가. 염파장군 늙었지만 아직 건재한지를(憑誰問廉頗老矣 尙能飯否). 추노아(醜奴兒)라는 사에서도 근심과 애환속에서 스스로의 삶을 관조하는 자세를 잘 표현하고 있다. “어릴 때에는 근심 뜻도 모른채 즐겨 높은 누대에 올랐었네. 이제 근심 뜻을 알기에 입에 올리려다 그만두었네. 입에 올리기를 그만두고는 쾌청한 가을이라고 말하네.”
남송의 사는 북송의 사와는 시대적 상황이 다른 관계로 표현에 차이가 발견된다. 상대적으로 번영과 안정을 누린 북송의 사가 안락함과 여유를 강조했다면 남송의 사는 불안과 걱정 그리고 쫓기는 마음을 빈번히 표현하고 있다. 북송의 시인 이청조와 신기질은 제남 출신의 동향인이다. 이청조의 사가 신기질로 넘어오면서 북송과 남송의 사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신기질은 오랑캐에 격렬히 저항한 무장의 삶과 저항 시인의 삶을 동시에 살았다. 그의 작품에서 문과 무, 저항과 은일의 조화를 느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