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무
2020년 09월 18일(금) 00:00 가가
20대, 사상이 밥 먹여 주지 않는다는 매우 단순한 사실을 깨달았을 즈음이었다.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길을 걷다가 가로수를 보고 문득 생각했다.
‘차라리 나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최소한 먹고 살기 위해서 아등바등 돌아다닐 필요는 없을테니까’
나무가 부러웠다. 죽든 살든 한자리에 가만히 있으면 되니까. 한곳에 매이는 것은 숙명이지만, 오히려 그것이 나를 부럽게 했다.
집합 금지 행정 명령이 내려진 지 3주가 지났다. 과장하자면 숨만 쉬고 살고 있다. 평소에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거의 전폐되다시피 했다. 그나마 하는 일은 라이브 법문. 이 역시도 일요 법회 한 뒤로는 2주 가까이 없다. 하는 일 없이 숨만 쉬고 있는 것이 마치 한곳에서 가만히 광합성만 하면 되는 나무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세끼 밥 잘 먹고, 사생활 보장되는 개인의 방이 있고, 거기서 편하게 잘 수 있으니 말이다. 젊은 시절엔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게 전쟁 같았는데, 지금은 아니다. 확실히 내가 어딘가에 기대어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긴 하다. 지금 내가 어딘가에 기대어 살고 있다는 건, 어쨌든 지난 긴 세월 동안 어딘가에 뿌리를 내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을 생각해 보면 지금의 나를 나무에 비유하는 것이 그리 과한 억지는 아니다.
젊은 시절엔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씨앗 같다고나 할까. 여기저기 뿌려진 씨앗. 어떤 씨앗은 강물 위에, 어떤 씨앗은 아스팔트 위에, 어떤 씨앗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 가운데 떨어져서 제대로 피어 보지도 못하고 사라지고 만다. 겨우 자리를 잡더라도 그늘진 곳이거나, 땅이 척박하거나, 아니면 한동안 비가 오질 않거나 하면 역시 뿌리내리지 못하고 시절 인연이 다한다. 미약하나마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어 올리기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씨앗에게는 대단한 성취다.
지금의 나는 의도와 무관하게 다행히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긴 내렸다. 사실 뿌리내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한곳에 가만히 있으면 된다. 다행히 이런저런 인연이 맞아서 뿌리내릴 조건이 주어진다면 나머지는 시간이 알아서 다 해준다. 그래서 어른들이 한결같이 한 우물만 파라고 하는 것이다. 부평초 같은 인생이 고달픈 건 나이를 먹을수록 더하다. 어디가 되었건 뿌리를 내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젊었을 땐 넘치는 에너지를 물 쓰듯 쏟아부으며 돌아다니는 게 제격이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만족할 만한 곳에 뿌리를 내릴 수 있다. 하지만 기실은 그렇게 생각만 하는 것이지 실제로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의 나를 여기에 뿌리내리게 한 것은 나의 의지이기 보다 숱한 우연들이다. 그 우연이란 것이 너무도 소소해서 지금은 물론 당시에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부터, ‘왜 하필 그때 내게 그런 일이…’ 하며 생각날 적마다 속을 쓰리게 하는 것까지 실로 천차만별하고 다종다양하다. 새털보다 가벼운 온갖 우연들 덕에 나는 어제 하루도 별일 없이 잘 먹고 잘 잤다. 지금 내가 뿌리내린 곳의 토양이 얼마나 좋은지, 일조량은 충분한지, 내가 내린 뿌리는 튼실한지, 이파리를 좀먹는 벌레들은 없는지 이것저것 따져보며 다른 나무들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온갖 망상들이 장마철 곰팡이처럼 마음 속에 퍼져버린다. 아무 소용없는 생각 쪼가리들이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달라진다고 해도 거기서 거기다.
어찌어찌해서 나무로 성장하였다면 당연히 누군가의 그늘이 되고 바람막이가 되어 주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우선은 충분히 후회해야 한다. 뭐가 되었건 후회하지 않고는 제대로 할 수 없으니까. 사람이 못나서 그늘과 바람막이가 되어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럴지라도 부지런히 살아야 한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것이 인연이다. 제대로 살고 있다면 아무리 볼품없는 나무라도 누군가에게는 그늘이 되고 바람막이가 될 것이다.
모든 인연은 우연으로 내게 와 필연이 된다.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숱한 인연들이 스쳐간다. 오늘도 신은 우연이라는 실타래로 누군가의 삶을 직조하고 있다. 당신과 나는 ‘우연’이 만든 한 그루 나무이다.
‘차라리 나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최소한 먹고 살기 위해서 아등바등 돌아다닐 필요는 없을테니까’
집합 금지 행정 명령이 내려진 지 3주가 지났다. 과장하자면 숨만 쉬고 살고 있다. 평소에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거의 전폐되다시피 했다. 그나마 하는 일은 라이브 법문. 이 역시도 일요 법회 한 뒤로는 2주 가까이 없다. 하는 일 없이 숨만 쉬고 있는 것이 마치 한곳에서 가만히 광합성만 하면 되는 나무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세끼 밥 잘 먹고, 사생활 보장되는 개인의 방이 있고, 거기서 편하게 잘 수 있으니 말이다. 젊은 시절엔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게 전쟁 같았는데, 지금은 아니다. 확실히 내가 어딘가에 기대어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긴 하다. 지금 내가 어딘가에 기대어 살고 있다는 건, 어쨌든 지난 긴 세월 동안 어딘가에 뿌리를 내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을 생각해 보면 지금의 나를 나무에 비유하는 것이 그리 과한 억지는 아니다.
지금의 나를 여기에 뿌리내리게 한 것은 나의 의지이기 보다 숱한 우연들이다. 그 우연이란 것이 너무도 소소해서 지금은 물론 당시에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부터, ‘왜 하필 그때 내게 그런 일이…’ 하며 생각날 적마다 속을 쓰리게 하는 것까지 실로 천차만별하고 다종다양하다. 새털보다 가벼운 온갖 우연들 덕에 나는 어제 하루도 별일 없이 잘 먹고 잘 잤다. 지금 내가 뿌리내린 곳의 토양이 얼마나 좋은지, 일조량은 충분한지, 내가 내린 뿌리는 튼실한지, 이파리를 좀먹는 벌레들은 없는지 이것저것 따져보며 다른 나무들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온갖 망상들이 장마철 곰팡이처럼 마음 속에 퍼져버린다. 아무 소용없는 생각 쪼가리들이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달라진다고 해도 거기서 거기다.
어찌어찌해서 나무로 성장하였다면 당연히 누군가의 그늘이 되고 바람막이가 되어 주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우선은 충분히 후회해야 한다. 뭐가 되었건 후회하지 않고는 제대로 할 수 없으니까. 사람이 못나서 그늘과 바람막이가 되어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럴지라도 부지런히 살아야 한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것이 인연이다. 제대로 살고 있다면 아무리 볼품없는 나무라도 누군가에게는 그늘이 되고 바람막이가 될 것이다.
모든 인연은 우연으로 내게 와 필연이 된다.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숱한 인연들이 스쳐간다. 오늘도 신은 우연이라는 실타래로 누군가의 삶을 직조하고 있다. 당신과 나는 ‘우연’이 만든 한 그루 나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