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자 지휘구조 가해 정도 분류…40년 발뺌 변명 끊어야
2020년 02월 11일(화) 14:47
(7) 이젠 가해자가 진실의 입 열어야 한다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 진압작전을 마친 수백명의 계엄군이 도청광장에 모여 있다. <광주일보 자료사진>

5월은 온갖 꽃이 피어나고 생명이 약동하는 싱그러운 달이다. 하지만 광주에게 5월은 아직도 ‘아픔’이다. 아직 1980년 5월을 떠나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40년이 지났다. 하지만 광주에서 일어난 학살을 지시하고, 학살을 집행한 이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발포 명령’, ‘헬기 사격’ 문제는 여전히 미궁 속에 빠져있는 것이다.

학살의 책임자인 전두환, 노태우 등 두 전직 대통령들에 대해선 법적 처벌이 이뤄졌지만 4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최초 발포명령자와 발포명령 지시자조차 규명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5·18의 최고책임자인 전두환은 그날의 일을 사죄하기는커녕 호위호식하는 모습으로 광주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있다.

5·18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해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한 전두환은 사자(死者)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됐지만 알츠하이머와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재판에 출석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씨는 지난해 11월 골프라운딩에서 본인은 광주와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모습이 동영상에 촬영됐고, 이어 군사 반란을 일으킨 지 40년이 되는 날인 지난해 12월 12일 고급 음식점에서 ‘샥스핀 오찬’을 즐기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이날 음식점에는 전씨와 그의 부인 이순자씨, 군사 반란에 가담했던 정호용 전 특전사령관과 최세창 전 3공수여단장 등 10명이 참석해 1인당 20만원 상당의 코스 요리를 먹으며, 축하 분위기 속에서 오찬을 즐겼다는 소식에 아직도 고통받고 있는 5·18 유가족들에게 또 다른 아픔을 안겨줬다.

전씨를 비롯한 1980년 5월 광주에서 수많은 사망자와 부상자를 만들어낸 가해자들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거나 혹은 법적 처벌은 받았더라도 사면을 받았다.

5·18기념재단에 따르면 5·18에서 4000여 명이 넘는 수많은 시민이 계엄군에 의해 폭행을 당하고 트럭에 실려 광주교도소·상무대에 연행됐다. 연행자는 영창으로 넘겨지기 전 505보안대에서 온갖 고문을 당했다.

당시 사망 행불자가 181명에 달하고, 부상자는 2762명, 기타 희생자는 1472명에 이른다.

하지만 4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이러한 학살을 가했던 이들에 대한 책임 구분도 모호하다. 이들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진행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5·18이 국가 차원의 명예를 회복하고, 수십년이 지났음에도 5·18의 가해자들의 실태에 대한 기초적 자료조사가 부재했고 이러한 조사결과가 축적되지도 못한 실정이다.

일부 5월 전문가들은 5·18 가해자들에 대한 폭 넓은 실태 조사나 가해정도에 따른 분류, 법률적 제재 등의 과정이 대부분 생략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물론 가해자들의 대한 조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5~2007년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는 살인·고문·사체유기·성폭행을 했던 3·7·11 공수부대원을 면담조사를 실시 했다. 하지만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는 답변을 강제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군인들은 자신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아 성과 없이 조사는 종료됐다.

그들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런 일이 있었더라도 나는 관련되지 않았다”는 답변만을 되풀이했고 “오히려 내가(공수부대원) 피해자다”라는 자세로 일관하는 등 사죄와 반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렇듯 학살 가해자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이유는 5·18 진상규명 과정이 험난했기 때문이다.

5·18은 과거 살아있는 권력 앞에서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없이 정치적 타협으로 피해보상부터 진행됐고, 국민적 화합이라는 명목아래 책임자들이 사면되면서 가해자들에 대한 제대로 된 조사가 진행될 수 없었다.

한 5월 연구자는 “5·18 가해자란 무엇인가 라는 기초적인 정의도 합의되지 못했다”면서 “가해자의 위계, 가해 행위에 참여한 국가기관과 사회의 주요 부문, 가해행위의 유형, 가해의 방식에 따른 체계적인 분류와 기록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가해자에 대한 위계구조와 가해행위 유형의 조사나 연구가 제대로 진행된다면, 직업 군인과 의무 복무한 병사에게 동일한 책임을 물을 것인지, 적극적으로 학살에 나선 자와 소극적으로 나선 이들을 분리할 수 있을 것인지 하는 등의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5·18 가해자 조사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무엇보다 체계적인 1차 사료의 확보라는 게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물론 가해자들은 국가기관이거나 준국가기관 혹은 국가기관의 비호를 받아왔던 집단이라는 점, 그리고 가해자들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서 대부분 문서기록을 남기지 않거나 훼손·가공했기에 자료 확보가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렇기에 계엄군으로 참여했던 가해자들의 그동안의 구술기록은 물론 관련 내용이 담긴 편지나 일기, 일지 등도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남아있는 가해자들의 증언일 것이다.

송선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 위원장은 “진실을 말할 수 잇는 사회적 분위기와 사회적 동의를 만들어내 1980년 5월 당시 광주에서 가해자들이 진실을 얘기해야 하는 시점”이라면서 “당시 가해자들을 지휘계통의 상층에서부터의 조사가 아닌 밑부분인 사병들부터 조사를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정병호 기자 jusbh@kwangju.co.kr
오피니언더보기

기사 목록

광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