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야 한다
2020년 01월 17일(금) 00:00 가가
가톨릭교회의 교구 사제들은 3년에서 5년 동안 한 성당에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하고 다음 소임지로 이동한다. 주교님의 명을 받아 이동하게 되는데, 특히 1월 인사 이동 시기가 오면 사제들은 물론 각 본당의 신자들도 ‘어느 신부님이 이동하시는지?’ ‘어디로 이동하시는지?’ ‘왜 신부님들은 한 성당에 계속 살지 않고 다른 성당으로 이동하는 것인지?’ 등의 궁금증을 갖게 된다.
종교를 가지고 신앙의 삶을 사는 것은 자기 스스로 원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신앙인들은 자신이 믿는 절대자, 곧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산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제들도 이와 마찬가지다. 사제는 자기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제들의 절대적인 모델이요 믿음의 대상인 예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 모든 사제들은 사제가 될 때 내 뜻대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도우심으로 살겠다고 서약한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티아서 2장 20절)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도 같은 서약이다.
그러나 사제들도 작고 나약한 인간 존재다.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서약했지만, 인간적인 나약함에 항상 주저하고 갈등하는 똑같은 인간 존재이다. 그래서 사제들이 임기를 마치고 떠나야 할 때, 여러 복잡한 마음마저 들 때가 있다. 언젠가 ‘떠나지 않는다면, 어떤 새로운 것도 배울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특히 사제의 길을 준비할 때, 익숙하고 몸에 배인 곳을 떠나야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고 자신의 삶도 정체되지 않고 쇄신할 수 있다고 배웠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말은 진실이다. 가득 채워진 그릇에 다른 어떤 것도 들어갈 자리가 없다. 고인 물이 썩어 버리는 것처럼 비움 없이 채우려한다면 과유불급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쉽게 말해 각자의 삶에서 비워 내고 떠나보내는 작업을 잘해야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낮추어야 높아질 수 있다’는 말도 진리다. 항상 높은 곳을 향하는 우리의 모습은 매몰차고도 무섭다. 더 좋은 곳을 찾는 것, 더 높은 곳을 추구하는 것,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이길 수 있다고 우리는 자부한다. 그러나 좋은 것을 찾다 보니 나쁜 것이 무엇인지 망각하고, 높은 곳을 추구하다 보니 낮은 자들의 아픔에 무관심하고, 많은 것을 채우다 보니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기득권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자아낸다. 자기가 신이나 된 것처럼 어리석은 모습인데, 구약 성경의 창세기에서 이 어리석음을 ‘교만’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 어리석음에 의해서 발생된 ‘교만’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못하고 거짓과 폭력으로 속이고 짓밟게 되는 악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악한 모습을 만들어 내는 ‘교만’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오래 머물다 보면, 익숙해지고 주저앉는다. 그리고 오래되고 익숙한 것은 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이제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감사함까지도 잊어버린다. 그래서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은 이들이 되는 것이다. 결국 ‘교만’을 이길 수 있고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익숙해지고 편안해진 것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필자는 어제 3년 동안 살았던 영암 신북 성당을 떠나 새로운 소임지로 부임했다. 항상 떠남을 준비해야 하는 삶이라 이제 좀 익숙해질 만도 한데, 역시 익숙해졌던 곳, 정든 곳을 떠나는 것이 쉽지 않다. 신자들과 나누었던 수많은 대화들, 경륜과 노고가 깃든 어르신들의 깊은 주름, 아침마다 바라보았던 월출산 등이 영화의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사제들은 익숙한 것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무엇에든 감사해야 한다. 그래야 사제는 정체되어 썩어버리는 물이 아닌 생명과 활력이 넘치는 존재가 될 것이다. 떠나야 새로워질 수 있다. 버리고 비워야 새로 채울 수 있다. 그래서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코 1장 38절)
이런 인간의 악한 모습을 만들어 내는 ‘교만’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오래 머물다 보면, 익숙해지고 주저앉는다. 그리고 오래되고 익숙한 것은 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이제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감사함까지도 잊어버린다. 그래서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은 이들이 되는 것이다. 결국 ‘교만’을 이길 수 있고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익숙해지고 편안해진 것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필자는 어제 3년 동안 살았던 영암 신북 성당을 떠나 새로운 소임지로 부임했다. 항상 떠남을 준비해야 하는 삶이라 이제 좀 익숙해질 만도 한데, 역시 익숙해졌던 곳, 정든 곳을 떠나는 것이 쉽지 않다. 신자들과 나누었던 수많은 대화들, 경륜과 노고가 깃든 어르신들의 깊은 주름, 아침마다 바라보았던 월출산 등이 영화의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사제들은 익숙한 것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무엇에든 감사해야 한다. 그래야 사제는 정체되어 썩어버리는 물이 아닌 생명과 활력이 넘치는 존재가 될 것이다. 떠나야 새로워질 수 있다. 버리고 비워야 새로 채울 수 있다. 그래서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코 1장 3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