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병 파병
2020년 01월 17일(금) 00:00
국군의 해외 파병은 1964년 베트남전 참전이 처음이었다. 이후 점차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는 우리의 해외 파병은 다국적군 성격으로 참여하는 형태와 유엔 평화유지군(PKO) 자격이나 국방교류 및 인도적 지원 차원 등 세 종류로 구분된다. 우리나라는 1950년 6·25전쟁으로 16개 유엔 회원국의 병력 지원을 받았다. 이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파병은 전투병보다는 공병이나 수송단, 의료지원단이 주를 이루고 있다.

지금은 국제적 역학 관계에 따라 우리 정부의 결정으로 파병을 하지만, 지난 역사 속 파병은 대부분 강대국의 일방적 요구에 의해 전투병을 파견한 약소국의 흑역사였다.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는 1281년 일본 정벌을 위해 병선 900척과 뱃사람 1만 5000명, 군사 1만 명, 군량 11만 석을 요구했다. 그나마 정벌 과정에서 태풍으로 일본 정벌이 실패하면서 고려는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조선 시대에도 1618년 명나라는 후금을 치기 위해 병사 1만 3000명을 요구한다. 이때 광해군은 강홍립 장군을 파견하면서 병사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전투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말 것과 상황 불리 시 후금에 투항할 것을 지시한다. 특히 후금 투항 시에는 약소국으로서 명나라의 압력 탓에 파병한 것이라는 불가피론을 역설토록 했다. 강홍립 장군은 광해군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고 우리 병사들의 피해는 미미했다.

조선 효종 때인 1654년에는 청나라의 요구에 못 이겨 조총군 100명과 초관(종 9품 장교) 50명을 파견했다. 그렇게 해서 러시아를 상대로 한 1차 나선 정벌과 1658년 조총군 200명·초관 60명을 파견한 2차 나선 정벌에서 의미 있는 전공을 세운다. 다만 나선 정벌은 북벌론자인 효종이 청나라를 치기 위해 양성한 군대를, 청나라를 위해 사용한 아이러니한 사건이기도 하다.

미국이 요청한 호르무즈해협 파병 문제가 문재인 정부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국익을 최우선으로 파병 여부를 결정하되, 불가피한 상황에서는 우리의 피해를 최소화활 수 있도록 해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채희종 사회부장 chae@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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