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건판 사진
2019년 12월 17일(화) 04:50
19세기에 카메라를 개발하려는 발명자들을 괴롭힌 것은 이미지를 영구히 고정할 수 있는 화학물질을 찾는 것이었다. 마침내 1826년 프랑스 니엡스(1765~1833)가 현대적 의미의 최초 사진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여덟 시간이나 노출해 찍은 사진을 ‘태양이 그린 그림’이라는 의미의 ‘헬리오그라프’(Heliograph)라고 이름 붙였다. 니엡스와 파트너가 된 프랑스 다게르는 1839년에 은으로 도금한 구리판을 사용하는 다게레오 타입을 발명했는데 이를 ‘은판(銀板)사진’이라고 한다.

이후 사진술은 ‘콜로디온 습판법’(Wet Plate)과 ‘젤라틴 건판법’(Dry Plate) 그리고 얼마 전까지 대중들에게 익숙한 셀룰로이드 롤필름을 거쳐 디지털 CCD로 이어졌다. 필름 이전에 사용된 습판법과 건판법은 유리가 필름 역할을 대신했다. 습판법은 유리에 바른 감광유제가 마르기 전에 촬영한 후 곧장 현상을 해야 하는 반면 건판법은 젤라틴 감광유제를 유리판에 발라 건조시켰다.

국립 중앙박물관이 최근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촬영한 유리건판 사진 3만8000여 점을 공개했다. 디지털화한 사진들은 ‘e뮤지엄’(www.emuseum.go.kr)에서 누구나 볼 수 있다. 사이트에 ‘전남’이라는 검색어를 넣으면 순천 송광사와 화순 운주사·쌍봉사, 해남 대흥사 등 많은 문화재 사진들이 뜬다.

수많은 이미지 가운데 전국 각 지역별로 남녀 체격을 측정한 사진들이 눈길을 끈다. 광주·전남 지역에서도 광주를 비롯해 나주, 여수, 순천, 화순, 진도 등지에서 성인 남녀를 5~10명씩 두 줄로 세워 상반신을 정면과 측면에서 촬영했다. 흡사 영화 ‘25시’에 나왔던 인종학 연구 장면을 연상시킨다.

조선총독부에서 파견한 유리건판 사진가는 작은 상자만한 카메라를 삼각대에 고정시킨 뒤 검은 보자기를 둘러쓰고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사진을 촬영했을 것이다. 카메라 앞에 억지로 끌려와 피사체가 돼야 했던 식민지 조선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20세기 초 식민시대의 생활상이 고스란히 담긴 유리건판 사진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 역시 극일(克日)의 또 다른 방법일 것이다.

/송기동 문화2부장 song@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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