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소작 요나라 전성시대 이끈 여걸
2019년 08월 27일(화) 04:50 가가
소작(蘇綽, 953~1009)은 요나라 경종의 부인으로 나어린 아들 성종을 대신해 섭정에 나서 국정을 개혁했다. 1004년 북송과 ‘전연의 맹’을 맺어 경제적 이익과 함께 장기간 화평을 누렸다.
어릴 때 이름은 연연(燕燕)으로 5대 황제 경종 야율현과 결혼해 소태후가 되었고 6대 황제 성종을 낳았다. 경종은 어려서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고 국정보다는 사냥에 관심이 많았다. 이에 점차 조정의 중요 대소사에 관여하게 되었다. 928년 경종이 35세로 죽고 12살 나어린 성종 야율융서가 제위에 오르자 부득이 섭정에 나서게 되었다. 이후 1009년 죽을때까지 사실상 요나라 국정을 책임졌다. 그녀는 소설에 묘사되는 바처럼 맹렬 여성이 아니라 현명하고 정치적 대의에 밝은 여성 지도자였다. 그녀가 당면한 정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제후와 중신들은 각기 군대를 거느리고 강력한 정치적 발언권을 행사했다. 한인 사대부와 거란 일족간의 갈등도 상당했다. 그녀는 과감한 국가개혁으로 정치적 리더십을 확보했다. 요 건국 이후 유지된 관리 세습제와 거란족 우대책을 과감히 타파했다. 거란족 출신의 야율사진, 야율휴가 등과 함께 한인 관리 한덕양 등을 발탁해 종족간 인사 균형책을 시행했다.
종친인 야율사진에게는 조카딸을 시집보내 충성을 확보했다. 아들 야율융서와 야율사진이 절친한 친구 관계를 맺도록 격려했다. 성종은 자신이 아끼는 말을 야율휴가에게 하사해 그의 충성을 유도했다. 한덕양은 한지고의 손자로 소태후가 가장 신임하는 신료였다. 한지고는 태조 야율아보기의 신임을 받아 요나라의 의례를 만들어 국가의 기틀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발해국 정벌에 큰 공을 세워 중서령으로 승진했고 좌명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한지고의 셋째 아들 한광사 역시 요나라의 관직에 올랐고 소씨 집안 여자와 결혼했다. 사실상 거란의 귀족이 된 셈이다. 한광사의 넷째 아들이 한덕양이다. 남원 추밀사로 있던 982년 9월 경종이 죽자 자신의 부하들을 소작의 궁궐로 보내 그녀를 보호했다. 또한 제후들이 사적으로 모이거나 왕래하지 못하도록 해 황권 찬탈의 움직임을 미연에 방지했다. 이 덕에 소작이 순조롭게 황후가 되었고 야율융서가 성종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그녀는 매사를 그와 상의했다. 그의 처와 자식을 죽였다. 사실상 소태후와 한덕양은 부부 같은 관계가 되었다. 일상 생활을 같이 했다. 성종은 자신의 계부격인 한덕양을 진심으로 믿고 따랐다. 매일 자신의 두 아들을 한덕양의 거처에 보내 문안 인사토록 했다.
거란족과 한족의 화합을 위해 노력했다. 법치를 확고히 해 한족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했다. 거란인이 한족을 죽여도 소나 말로 배상하면 그만일 정도로 한인에 대한 차별대우가 심했다. 남쪽 송나라로 도망간 한인들을 회유하는 정책을 펴 다수의 한인이 다시 요나라로 돌아오도록 유도했다. 농업과 양잠을 장려하고 세금 부담을 줄여주었다.
1004년 북송과 맺은 ‘전연의 맹약’은 최고의 업적이었다. 북송의 조광윤과 조광의는 요나라를 계속 정벌했다. 베이징 주변의 고량하 싸움에서 요군은 북송군을 대파했다. 986년 조광의가 일으킨 싸움에서 북송의 명장 양업은 요나라의 계략에 말려 전사했다. 986~1003년 약 20년간 요나라는 거의 해마다 남쪽의 송나라를 정벌했다. 1004년 20만 군대를 이끌고 남하한 요나라는 현 하남성 복양에 해당하는 전연에서 송군과 대치했다. 재상 구준의 건의로 친정했지만 송의 진종은 요와 싸움보다는 화친을 희망했다. 결국 1004년 전연의 맹약이 맺어졌다. 매년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을 받는 협약으로 요나라 재정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후 40년간 양국의 화평이 이어졌다.
그녀는 아들인 성종을 역사상 보기 드문 명군이 되도록 엄격히 교육시켰다. 하루는 성종이 사냥에 나갔다가 술을 마시자 아들을 나무라면서 “천하의 주인으로서 반드시 깊게 경계해야 한다”고 훈계했다. 1009년 성종에게 대권을 넘기고 섭정에서 물러났다. 유주에서 말년을 보내기 위해 이동 중 병에 걸려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어릴 때 이름은 연연(燕燕)으로 5대 황제 경종 야율현과 결혼해 소태후가 되었고 6대 황제 성종을 낳았다. 경종은 어려서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고 국정보다는 사냥에 관심이 많았다. 이에 점차 조정의 중요 대소사에 관여하게 되었다. 928년 경종이 35세로 죽고 12살 나어린 성종 야율융서가 제위에 오르자 부득이 섭정에 나서게 되었다. 이후 1009년 죽을때까지 사실상 요나라 국정을 책임졌다. 그녀는 소설에 묘사되는 바처럼 맹렬 여성이 아니라 현명하고 정치적 대의에 밝은 여성 지도자였다. 그녀가 당면한 정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제후와 중신들은 각기 군대를 거느리고 강력한 정치적 발언권을 행사했다. 한인 사대부와 거란 일족간의 갈등도 상당했다. 그녀는 과감한 국가개혁으로 정치적 리더십을 확보했다. 요 건국 이후 유지된 관리 세습제와 거란족 우대책을 과감히 타파했다. 거란족 출신의 야율사진, 야율휴가 등과 함께 한인 관리 한덕양 등을 발탁해 종족간 인사 균형책을 시행했다.
1004년 북송과 맺은 ‘전연의 맹약’은 최고의 업적이었다. 북송의 조광윤과 조광의는 요나라를 계속 정벌했다. 베이징 주변의 고량하 싸움에서 요군은 북송군을 대파했다. 986년 조광의가 일으킨 싸움에서 북송의 명장 양업은 요나라의 계략에 말려 전사했다. 986~1003년 약 20년간 요나라는 거의 해마다 남쪽의 송나라를 정벌했다. 1004년 20만 군대를 이끌고 남하한 요나라는 현 하남성 복양에 해당하는 전연에서 송군과 대치했다. 재상 구준의 건의로 친정했지만 송의 진종은 요와 싸움보다는 화친을 희망했다. 결국 1004년 전연의 맹약이 맺어졌다. 매년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을 받는 협약으로 요나라 재정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후 40년간 양국의 화평이 이어졌다.
그녀는 아들인 성종을 역사상 보기 드문 명군이 되도록 엄격히 교육시켰다. 하루는 성종이 사냥에 나갔다가 술을 마시자 아들을 나무라면서 “천하의 주인으로서 반드시 깊게 경계해야 한다”고 훈계했다. 1009년 성종에게 대권을 넘기고 섭정에서 물러났다. 유주에서 말년을 보내기 위해 이동 중 병에 걸려 57세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