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송 전남대 5·18연구소 교수] 5월의 진실을 찾아서 <6> 5월 21일 군 발포 Ⅱ
“계엄군 3차례 집단발포는 모두 20사단 투입작전과 연결된다”
도청 앞 집단학살 이전에 광주역과 전남대서 집단발포
20일 밤 광주역 사격 - 20사단 집결지 확보위한 작전 과정
21일 오전 전남대에서 사격 - 3공수 광주역 사격의 연장
21일 계엄군의 작전은 20사단 병력 도청 투입이 핵심
2019년 08월 22일(목) 04:50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 광장 위를 날고 있는 군용헬기. 계엄군은 21일 새벽 광주에 도착한 20사단 병력을 도청에 투입하기로 했지만 시위대의 저항으로 무산되자 헬기를 이용한 공중침투 작전을 세웠다. <광주일보 자료사진>

문서 1. 1988년 3월에 작성된 군 문서. 계엄군의 최초 사격을 5월 21일 10시 전남대 정문으로 적시하고 있다.






문서 2. 1988년 5월에 작성된 문서 1의 후속 문서. 군은 5·18 계엄군의 최초 사격을 5월 22일 0시 40분 광주교도소에서 발생한 것으로 상정했다.






문서 2. 1988년 5월에 작성된 문서 1의 후속 문서. 군은 5·18 계엄군의 최초 사격을 5월 22일 0시 40분 광주교도소에서 발생한 것으로 상정했다.






문서 4. 20사단의 광주 출동을 명령한 육군본부의 작전 조치 사항. 20사단의 최초 도착지가 송정리역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서 5. 전교사 작전일지는 20사단의 최초 도착지가 송정리역이 아니라 광주역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7월 연재(25일자 10면)에서 1980년 5월 21일 오전 8시 전투태세인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고, 신군부 핵심 인사들이 대거 광주를 방문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진돗개 하나 발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전개된 실탄 분배는 군의 사격이 어떻게(how) 이루어졌는지를 확인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또한 신군부 핵심관계자들의 광주 방문은 누구의 명령(who)으로 사격이 이루어졌는지를 가늠하는 단초가 된다. 아직까지 군의 집단 발포가 왜(why), 누구의 명령(who)으로, 어떻게(how) 이루어졌는지 불분명한 상황에서, 이번 연재에서는 왜(why)에 집중해서 군 발포의 진실을 다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계엄군의 최초 사격으로 둔갑한 5월 21일 도청 앞 집단 발포

신군부는 5월 21일 오후 1시 30분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가 계엄군의 최초 사격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 발포는 계엄군의 최초 사격이 아니었다. 계엄군은 5월 21일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가 있기 이전에 이미 광주역과 전남대에서 집단 발포를 자행했다. 이러한 사실은 문서 1, 2, 3의 군 기록에서 확인된다.

군은 1988년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진상규명 요구가 분출되는 상황에서 내부적으로 5·18관련 군 기록을 수집하고 각 쟁점별 대응 논리를 개발했다. 문서 1, 2, 3은 군의 최초 발포와 관련하여 당시까지 제기된 주요 쟁점을 정리하고 군의 대응 논리를 체계화한 내부 문서들이다.

문서 1은 1988년 3월과 4월 사이에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문서는 계엄군의 최초 사격을 5월 21일 10시 전남대 정문에서의 사격으로 적시하고 있다. 전남대학교에 주둔한 3공수여단은 정문을 돌파한 시위대를 향해서 사격을 실시했다. 군은 당시의 사격은 무장시위대의 공격에 따른 대응 사격이라고 주장한다.

문서 2는 1의 후속 문서로서 1988년 5월에 작성되었다. 이 문서에 의하면 계엄군의 최초 사격은 5월 22일 0시 40분 광주교도소에서 발생했다. 군은 광주교도소를 습격한 무장시위대의 사격에 대한 대응 사격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림 2는 계엄군의 최초 발포 시기를 5월 20일 23시 5분 광주역 사격과, 5월 22일 광주교도소 사격으로 상정하고 최종 결론은 5월 22일 광주교도소로 결정했다.

문서 3은 1988년 6월에 작성된 511연구위원회의 회의 자료이다. 511연구위원회는 국회 광주청문회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군의 대응기구로 1988년 5월 11일 발족했다. 여기서는 계엄군의 최초 사격을 5월 21일 13시 30분 도청 앞 사격으로 판단했다. 계엄군의 사격은 시위대의 탈취 차량에 의한 살상행위와 무장 과격시위대의 소총 사격에 대응한 공포 사격이었다는 논리이다. 특히 사격과 직접 연관되는 실탄 관리는 숙영지에 통합 보관했으며, 실탄의 분배 시기는 공식기록이 없다고 정리했다.

군의 주장과 대응 논리에 따르면 5월 21일 오전 8시 진돗개 하나 발령 이후 실탄이 조직적으로 분배되었다는 사실은 사라져야 할 기록이 되었다. 위급한 상황에서 자위권 차원의 불가피한 사격이라는 신군부의 대응 논리와, 집단 발포 이전에 군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실탄 분배가 이뤄졌다는 사실은 양립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군 사격의 사실을 담고 있는 군 기록은 물론 군의 대응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 군 작전들이 군 기록에서 대거 사라졌다. 문서 1, 2, 3을 보면 군의 입장에 따라서 실재한 사건이 없는 사건으로 되고, 첫 번째로 작성한 문서에서 최초 사격으로 판단한 사건이 후속 문서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건으로 다뤄지는 등 광범위한 조작이 이루어졌다. 이런 연유로 5월 21일 군 발포의 진실을 규명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군 기록에서 사라진 5월 21일 군 작전

신군부가 도청 앞 집단 발포를 계엄군의 최초 사격으로 공식화하면서 5월 20일 광주역, 5월 21일 전남대 사격은 의혹으로만 남게 되었다. 1995년 특검 조사에서 비로소 사실로 확인되었지만 사격의 실체는 규명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군 기록에서 사라진 군 작전의 전모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5월 20일 23시 5분 광주역, 5월 21일 10시 전남대, 5월 21일 13시 30분 도청 앞에서의 집단 발포는 각각 별개의 우발적 사건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개별 사건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군 작전 과정에서 발생한 사격이다. 이들 사격은 모두 20사단의 광주투입 작전과 관련되어 있다. 5월 20일 광주역은 기차를 이용하여 광주에 투입될 20사단의 최초 도착 예정지였다. 5월 21일 도청 앞 광장은 헬기를 이용하여 광주 시내로 투입될 20사단의 공중 기동지였다.

문서 4는 20사단의 광주 출동을 명령한 육군본부의 작전 조치 사항이다. 여기에는 20사단의 최초 도착지가 송정리역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20사단은 5월 21일 새벽 송정리역에 도착하여 전교사로 이동했다. 군의 공식 기록과 실제 도착지역이 송정리역으로 일치한다. 이렇다 보니 20사단의 최초 도착 예정지는 지금까지 송정리역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문서 5의 전교사 작전일지는 20사단의 최초 도착지가 송정리역이 아니라 광주역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군의 공식기록인 육군본부 작전지침 내용과는 달리 20사단의 최초 목적지가 광주역이었다는 사실은 1995년 특검 조사에서도 확인되었다. 20사단 관계자들은 처음 출동 명령을 받았을 때 최초 도착 예정지는 광주역이었지만 이동하는 과정에서 송정리역으로 변경되었다고 진술했다.

5월 20일 밤 광주역 사격은 광주투입 명령을 받고 광주역으로 이동하고 있던 20사단의 집결지를 확보하기 위한 작전 과정에서 발생했다. 5월 21일 오전 전남대 사격은 광주역 사격을 자행한 3공수여단의 주둔지를 항의 방문한 시위대에 대한 사격이었다. 따라서 전남대 사격은 광주역 사격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5월 21일 도청 앞에서의 집단 발포가 발생한 시각은 20사단의 공중투입을 위한 헬기작전 시각과 일치한다. 5월 21일 새벽 광주역 도착이 무산된 20사단은 오전 8시 도로를 이용하여 광주 시내 진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시위대의 도로 봉쇄로 인하여 시내투입이 무산된다. 이에 군 수뇌부는 헬기를 이용하여 20사단을 도청에 투입하기로 결정한다. 5월 21일 도청을 중심으로 군이 전개한 핵심 작전은 20사단 병력을 도청에 투입하는 작전이었다.

이러한 내용은 1980년 당시 계엄사령부의 군 작전을 총괄했던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의 1995년 특검 진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두환과 정호용 특전사령관 등 신군부 핵심관계자들이 5월 21일 광주방문을 한사코 부정했으나 김재명 장군은 광주방문을 인정했다. 자신은 두 차례 광주를 방문했는데 도청 탈환작전에 관한 작전명령을 하달하기 위하여 25일 방문했으며, 다른 한번은 5월 21일 광주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출장을 갔다고 진술했다.

계엄군의 작전을 총괄하는 작전참모부장의 광주 출장은 단 두 차례에 불과하지만 5·18항쟁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와 작전을 앞두고 방문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5월 21일 출장 관련 김재명은 오전 11시경 광주에 도착해서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을 만나 상황을 청취하고, 각 부대를 방문하고 나서 오후 3시경 서울로 출발했다고 주장했다. 5월 21일 광주방문의 구체적인 목적은 언급하지 않고 단지 20사단의 작전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서라고만 진술했다. 계엄사령부 작전참모부장이 직접 출장을 가서 확인할 정도로 20사단의 작전이 중요했다는 반증이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하면 5월 21일의 사격은 계엄군의 자위권적 차원의 사격이 아니라 군 작전의 수행과정에서 발생한 사격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전은 20사단의 광주투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사라진 군 작전을 확인하고 복원하는 과정에서 군 사격의 실체적 진실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hesal@hanmail.net



※다음 원고는 9월 26일자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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