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이욱, 오대십국 시대 남당의 마지막 황제
2019년 07월 23일(화) 04:50 가가
이욱(李煜, 937~978)의 자는 중광(重光)으로 현 장쑤성 쉬저우에 해당하는 팽성 출신이다. 오대십국 시대 남당의 마지막 황제로 사서에서는 망국의 불운한 시인으로 평가된다.
남당의 두 번째 황제인 이경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한쪽 눈에 동공이 두 개라 자를 중광으로 지었다고 한다. 일찍부터 서화와 음악에 조예가 깊고 천재적 언어 감각을 보유했다. 친형인 문헌태자 홍기가 그의 재질을 질투해 어려서부터 마음고생이 많았다. 골육상쟁을 피하기 위해 더욱 예술에 몰두했다.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역사상 남당의 후주(後主)로 불리우는데 중원을 장악한 북송에 조공을 바치며 왕조의 명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북송의 태조 조광윤은 천하통일의 대업을 차근차근 진행했다. 971년 남당의 남쪽에 있는 남한을 멸하고 남당에 대한 압박 강도를 높였다. 971년 국호를 강남(江南)으로 바꾸고 중서성, 문하성을 좌내사부, 우내사부로 바꾸었다. 왕이란 작위도 공(公)으로 바꾸었다. 북송에 정벌의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974년 태조는 그에게 입궐하라는 명을 하달했다. 와병중인 이욱은 입궐할 수 없었고 태조는 이를 구실로 남당을 공격했다. 수도 금릉(현 남경)을 포위한지 10개월만에 남당이 투항해 3대만에 멸망하였다. 가족 45명을 이끌고 북송의 수도 카이펑으로 올라가 위명후라는 작위를 하사받았다. 이때부터 포로의 삶이 시작되었다. 남당은 건국 38년만에 망했는데 수도 금릉은 호화로운 궁전과 저택이 즐비하였다. 예술에 빠져 국방을 게을리한 왕조의 예정된 최후가 아닐 수 없다. 송나라 군대는 조빈과 반미를 총대장으로 해 수로와 육로로 금릉을 공격했다. 양자강에 이르자 3일만에 부교를 만들어 도강해 성을 함락시켰다. 이욱과 남당의 조정신료들은 부교로 양자강을 건널 수 있다는 사신을 외면한채 연회에 몰두하다 변을 당한 것이다.
그는 정사를 소홀히 하고 음주가무와 시작활동에 모든 공을 기울였다. 궁궐에 징심당(澄心堂)을 지어 문학 공간으로 활용했다. 부인에게 전족을 하는 악습도 이욱이 궁녀에게 행한 것이 최초라는 설도 전해진다. 점령한 송나라 군대가 궁녀들을 불러 모으자 등불의 연기가 맵다고 해 밤에 궁전을 어떻게 밝혔는지 물어보니 커다란 보주(寶珠)를 매달아 밝혔다고 한다. 조정의 사치가 왕조를 멸망으로 내몬 것이다. 이욱은 아황과 여영의 자매를 총애했다. 비파 연주에 뛰어난 아황을 961년 황후로 맞이했는데 964년 병으로 죽었다. 상처한 그를 위로해준 것이 아황의 여동생 여영이다. 병중인 언니 몰래 형부와 사랑을 나누었다. ‘보살만’은 여영과의 사랑을 묘사한 시인데 “잠시 누구라도 볼까 무서워 떨고 있네. 저는 나오기가 어려우니 임께서 마음껏 사랑을 주소서”라는 구절에서 둘 사이의 은밀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개봉의 생활은 옛 궁녀에게 보낸 “여기서는 아침저녁으로 눈물로 세수한다”는 편지 구절처럼 고통스러웠다. 특히 태종 조광의가 즉위하면서 훨씬 힘들어졌다. 여영을 총애한 태종은 빈번히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였고 그때마다 여영은 그를 원망했다고 한다. 그의 시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자 태종의 질투심이 심해졌다. 978년 칠월 칠석 이욱이 형제들과 42살 생일을 축하했는데 고국의 땅을 생각하니 견딜 수 없다는 기녀들의 노래소리가 울려퍼졌다. 태종은 이를 듣고 노해 사약을 내렸다고 한다.
그의 절명시 우미인(虞美人)에는 “밝은 달 아래 고국의 땅을 생각하니 차마 견딜 수 없어라(故國不堪回首月明中)”라는 구절이 있다. 견기독이라는 독약을 먹고 죽었는데 고통으로 몸이 구부러져 머리와 발이 서로 붙을 정도였다. 몇 달 후 여영도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따뜻한 심성을 가진 예인(藝人)이었다. 백성에 대한 애정이 깊고 시와 문학을 사랑한 다정다감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난세는 이욱과 같은 우유부단한 인물을 용납하지 않았다. 사직을 지키지 못한 패주(敗主)에 불과했다. 북송의 소동파는 “망국의 군주로서 마땅히 백성 앞에 나가 사죄해야 했다”고 비판했다.
남당의 두 번째 황제인 이경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한쪽 눈에 동공이 두 개라 자를 중광으로 지었다고 한다. 일찍부터 서화와 음악에 조예가 깊고 천재적 언어 감각을 보유했다. 친형인 문헌태자 홍기가 그의 재질을 질투해 어려서부터 마음고생이 많았다. 골육상쟁을 피하기 위해 더욱 예술에 몰두했다.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역사상 남당의 후주(後主)로 불리우는데 중원을 장악한 북송에 조공을 바치며 왕조의 명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개봉의 생활은 옛 궁녀에게 보낸 “여기서는 아침저녁으로 눈물로 세수한다”는 편지 구절처럼 고통스러웠다. 특히 태종 조광의가 즉위하면서 훨씬 힘들어졌다. 여영을 총애한 태종은 빈번히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였고 그때마다 여영은 그를 원망했다고 한다. 그의 시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자 태종의 질투심이 심해졌다. 978년 칠월 칠석 이욱이 형제들과 42살 생일을 축하했는데 고국의 땅을 생각하니 견딜 수 없다는 기녀들의 노래소리가 울려퍼졌다. 태종은 이를 듣고 노해 사약을 내렸다고 한다.
그의 절명시 우미인(虞美人)에는 “밝은 달 아래 고국의 땅을 생각하니 차마 견딜 수 없어라(故國不堪回首月明中)”라는 구절이 있다. 견기독이라는 독약을 먹고 죽었는데 고통으로 몸이 구부러져 머리와 발이 서로 붙을 정도였다. 몇 달 후 여영도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따뜻한 심성을 가진 예인(藝人)이었다. 백성에 대한 애정이 깊고 시와 문학을 사랑한 다정다감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난세는 이욱과 같은 우유부단한 인물을 용납하지 않았다. 사직을 지키지 못한 패주(敗主)에 불과했다. 북송의 소동파는 “망국의 군주로서 마땅히 백성 앞에 나가 사죄해야 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