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벌레의 죽음
2019년 07월 12일(금) 04:50 가가
몇 년 전인가, 딱정벌레처럼 생긴 벌레 한 마리가 방에 들어왔다. 시골에서는 너무도 흔한 일이라 그냥 내버려 뒀다. 오후가 되어서도 계속 방안에 있길래 왜 그럴까 잠깐 생각하다가 잊어버렸다. 다음 날 다시 보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죽은 것이다. 그제야 그 벌레에 관한 몇 안되는 기억들을 총동원해서 왜 이 친구가 여기서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 벌레는 미끄러운 장판 때문에 제대로 걷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결정적으로 방 문턱이 그 벌레에겐 너무 높았다. 그(녀)가 결코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이었다. 그(녀)에게는 죽음과도 같은 절망적인 벽이었을 것이다.
이런 벌레들에게 죽음은 너무도 흔한 일상이다. 얼마 전까지 내가 살던 곳은 산 속인데다 집안 구석구석 어두컴컴한 곳이 많아서 꼽등이가 무지무지하게 많이 살았다. 방에 불을 켜면 네다섯마리가 한꺼번에 방바닥을 돌아다니기도 할 정도였다. 꼽등이들의 삶을 옆에서 지켜보면 너무나도 허무하고 또 허무하다. 이들은 너무나 쉽게 죽는다. 좀 움직임이 둔하다 싶으면 금세 움직임이 없다. 그렇게 그 자리에서 방치된다. 그러면 친구들이 그의 몸집을 뜯어먹는다. 다리가 없는 놈. 다리만 덩그러니 있는 놈… 가지각색이다.
이런 친구들의 삶에 비하면 인간들의 삶은 축복 그 자체이다. 꼽등이나 딱정벌레의 삶 속에는 자연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주는 자신들만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가 자연과 맞닥뜨려서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 반면 인간은 자연과 분리된 자신들만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사회가 바로 그것이다. 사회가 원시적이고 조악할수록 인간의 삶은 죽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죽음은 일상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사회가 복잡해지고 정교해질수록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일상으로부터 죽음을 몰아낸다. 죽음을 준비하는, 죽음에 잠식된, 죽음에 덜미가 잡힌 자들은 곧 죽음과 동일하게 취급된다. 사회는 이들을 철저하게 격리한다. 그래서 다른 생명체와 달리 ‘인간’은 사회라는 보호막 안에서 평생동안 제대로 된 ‘죽음’을 접해 보지 않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사회는 죽음을 앞세운 자연과의 전투에서 살아있는 자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세운 거대한 성벽이며, 철저하게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세계이다.
그런데 이 사회라는 성벽은 묘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방어벽의 역할을 충실히 잘하고 있을 때, 사회 안에서 보호받는 사람들은 성벽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 벽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금의 관심도 없다. 저 벽이 뭐 하는 건지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원래부터 ‘그냥’ 거기 그렇게 마치 풍경처럼 있는 것으로 생각해버린다. 사람들에게서 저 벽의 존재감이 희미해질수록, 벽을 지키려는 노력 역시 희박해져 버린다.
마침내 어느 순간, 죽음을 앞세운 자연의 공격이 시작된다. 벽은 취약한 부분부터 맥없이 무너져 버린다. 그제야 평화롭게 살던 사람들은 정신없이 미쳐 날뛰기 시작한다. 서둘러 벽을 보수하고 쌓기 시작한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죽음의 포로가 된 이들로 벽을 쌓아 올리며 죽음과 자신들을 격리시킨다. 불과 4년 전, 메르스 사태 당시 우리들의 모습이다.
진보니 보수니 자비니 평등이니 하는 것들은 어디까지나 자연과의 격전지를 피해 후방에서 살아 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죽음과의 전투에서 그런 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 이 모든 것들은 삶의 대지 위에서 벌어지는 한편의 영화일 뿐, 삶과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성찰은 아니다.
사회가 건강하려면 죽음이 일상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 죽음이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병적일 정도로 죽음을 격리시키려 해서는 안된다. 저 성벽의 존재를 항상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사회는 죽음을 앞세운 자연의 공격에도 거뜬하게 견딜 수 있다.
사랑하는 애완동물, 가족 혹은 친구가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에 서서히 잠식당하고 마침내 죽어가는 것을 일상 속에서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내 몸 속에 집어넣는 다른 생명이 어떻게 생명임을 포기당하고 음식이 되어가는지 그 과정을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
하찮은 벌레 한 마리의 죽음조차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안겨줄 정도로 살아있는 우리는 삶과 죽음에 대해서 무지하다. 스티브 잡스는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다”라고 말했다.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사는 자만이 자신의 죽음을 제대로 준비할 수 있다.
마침내 어느 순간, 죽음을 앞세운 자연의 공격이 시작된다. 벽은 취약한 부분부터 맥없이 무너져 버린다. 그제야 평화롭게 살던 사람들은 정신없이 미쳐 날뛰기 시작한다. 서둘러 벽을 보수하고 쌓기 시작한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죽음의 포로가 된 이들로 벽을 쌓아 올리며 죽음과 자신들을 격리시킨다. 불과 4년 전, 메르스 사태 당시 우리들의 모습이다.
진보니 보수니 자비니 평등이니 하는 것들은 어디까지나 자연과의 격전지를 피해 후방에서 살아 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죽음과의 전투에서 그런 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 이 모든 것들은 삶의 대지 위에서 벌어지는 한편의 영화일 뿐, 삶과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성찰은 아니다.
사회가 건강하려면 죽음이 일상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 죽음이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병적일 정도로 죽음을 격리시키려 해서는 안된다. 저 성벽의 존재를 항상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사회는 죽음을 앞세운 자연의 공격에도 거뜬하게 견딜 수 있다.
사랑하는 애완동물, 가족 혹은 친구가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에 서서히 잠식당하고 마침내 죽어가는 것을 일상 속에서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내 몸 속에 집어넣는 다른 생명이 어떻게 생명임을 포기당하고 음식이 되어가는지 그 과정을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
하찮은 벌레 한 마리의 죽음조차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안겨줄 정도로 살아있는 우리는 삶과 죽음에 대해서 무지하다. 스티브 잡스는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다”라고 말했다.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사는 자만이 자신의 죽음을 제대로 준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