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2019년 07월 10일(수) 04:50

[고성혁 시인]

더위에 지치면 땀을 흘리다 형님을 생각한다. 물에 풀린 잉크처럼 형님의 외로움이 가슴을 적신다.

지금으로부터 50년도 넘은 어느 여름 방학, 나는 고향을 찾았지만 친구가 없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홀로 갯바위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이 하나 둘 바위 위에 자리를 잡았고 아버지가 다른 형도 멀찍이 떨어져 낚시를 드리우는 게 보였다. 그때 그 형과 나는 길에서 조우해도 서로 말을 건네지 않았다. 동네 애들은 우리의 이상한 관계를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우리가 눈빛이라도 건네면 으레 고약한 소문을 만들어 난처하게 하곤 했으니까. 아니 그것보다 우리 또한 서로의 존재를 상처로 받아들이고 있었을 것이다.

밀물이라 물고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오른 발에 힘을 주며 낚싯대를 잡아챘다. 그때였다. 몸이 휘청 앞으로 꺾여 공중을 날았다. 입질의 느낌에 나도 몰래 앞으로 뻗은 발이 허공을 내디딘 것이다. 순식간에 바다 속으로 내던져진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내가 수영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바다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끝내 바다 밑 칼끝 같은 따개비가 맨발을 쑤셔 발바닥이 칼로 벤 듯 섬뜩했다.

그렇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내 머리카락을 잡아 끌었다. 몸부림을 치는 내 손을 따돌리며 익숙하게 갯바위로 끌어낸 사람은 남보다도 못하게 살아왔던 그 형이었다. 창졸간에 달려온 형이 위험을 무릅쓰고 다이빙을 한 것이었다.

형은 그날 피가 솟구치는 내 발바닥에 풀잎을 짓이겨 붙인 다음 걷지 못하는 나를 업고 내가 방학 동안 와 있던 아버지 집 앞 보릿대 더미까지 데려다 줬다. 어쩌면 내 생명이 다했을 그때, 형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형님은 시골에서 중학을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 지금껏 변두리를 전전하며 반지하 원룸에서 홀로 살고 있다. 아, 형님 나이 곧 칠십이다. 오십오 년이 넘도록 서울 살면서 자기 명의로 방 한 칸도 마련해보지 못한 형님께 송구하고 또 송구하다.

그러나 그런 삶이 어디 형님뿐이랴. 지난 명절에 택배를 보내다 알게 되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내 형제들의 분투어린 삶의 공통점을. 가방 꼬다리를 두드리거나 압축 프레스 공장의 야근으로 구부러진 허리가 익숙했던 누나는 죽을힘을 다해 연립 202호를 마련했고, 평생 동안 시장에 좌판을 펴고 노점을 하던 처형은 지난해에야 검은 색 등기부 등본을 받아 들고 전화를 해왔다. 처형의 연립 101호는 그녀의 등골과 바꾼 것이다.

이들의 평균 나이를 셈해보니 75세. 내 사랑하는 형제들의 노고는 언제까지 계속돼야 할까. 형님과 처형의 반지하 방에서 듣는, 머리 위를 지나는 쿵쿵, 바람소리 혹은 인력 시장 새벽 일거리를 찾거나 리어카에 박스를 싣고 떼구르르 지나가는 목장갑 하나 없는 노인의 발등을 생각한다. 가슴을 쓸어내린다.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도 매번 알 수 없다. 우체국 책상에서 나는 그렇게 내 사랑하는 형제들의 생애를 반추하며 2만 9500원 짜리 완도산 종합 수산물 세트를 보냈다. 절망이 아닌 그동안의 노고에 대한 위무로서. 땀과 눈물로 과거를 부어 밥솥을 앉혔지만 쉬쉿, 넘치지 않는 밥물에 주저앉았을 그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고 희망의 샘물을 길어 올린 빛나는 삶의 내 사랑하는 형제들. 그들이야말로 내 인생을 점검하는 펜치와 장도리였고 나를 단단하게 단련시킨 보철물(補綴物)이었다. 이른 어둑새벽 101호 혹은 202호를 스칠 바람소리를 생각하면서 내 상처와 허물을 생각한다. 우리 형님 이 더운 여름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안부를 묻는 전화를 해도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말만 들린다. 가슴이 아리도록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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