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의 신앙인
2019년 06월 21일(금) 04:50

[정세완 원불교 광주 농성교당 교무]

작년에 일본 간사이 지방을 여행하면서 나라시에 있는 화엄종 본산인 동대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절 입구에는 많은 사슴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사람들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는다. 때로는 사람들의 손에 있는 음식을 빼앗아 먹기도 한다. 동대사에는 세계 최대의 목조 건물인 금당에 16미터의 대형 금동 불상인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다. 동대사를 나서며 대형 금동 불상처럼 사슴공원에서 놀고 있는 힘없고 연약한 사슴들도 바로 부처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화엄 사상의 핵심은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사상이다. 사자의 털 하나가 바로 사자라는 것이다. 이 사슴을 부처로 보지 못하면 어디에서도 부처를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2000여 년 전 예수님이 베들레헴의 한 마굿간에서 탄생하셨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을까? 예수님께서 만약 로마의 왕자로 태어나셨으면 오늘의 기독교는 어떠했을까?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부와 명예를 내려놓으시고 목숨까지 인류의 구원을 위해 바치시고 태초의 자리로 가셨기에 하느님의 아들로 선택받았다. 기독교 영성가 다석(多夕) 유영모는 신을 부를 때도 ‘없이 계신 하느님’이라 불렀다.

원불교에서는 없이 계신 하느님을 ‘공(空)’이라 부른다. 텅 비어서 아무 것도 없는 공이 아니다. 모든 색(色·형상)이 태어나서, 작용하고, 돌아가는 만물의 본향(本鄕)이다. 없는 가운데 꽉 차 있기에 ‘진공묘유(眞空妙有)’다.

길가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느껴야 한다.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 부처임을 깨닫는 순간 내 안의 부처가 살아남을 느낄 것이다.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는 21세기는 통섭의 인간을 원한다고 했다. 통합은 물리학적 합침이다. 샐러드와 같다. 사과와 오이의 만남이다. 융합은 화학적 합침이다. 수소와 산소의 결합으로 물이 되는 이치와 같다.

통섭은 생물학적 합침이다. 부부가 자식을 낳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통섭은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이 만나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과정으로 우리 사회의 모든 경계를 뛰어넘어 대통합을 이뤄냄을 의미한다. 통섭의 신앙인은 예수를 믿거나 부처를 믿거나 알라를 신앙하거나 상관없이 모든 종교인에게 주어진 화두이다.

세상은 다양한 환경 속에서 공존의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현시대의 다양한 가치관 속에 소통 부재는 사회적 갈등이 증폭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양성을 인정하고 창조하는 통섭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핵심 가치이다.

세계 최대의 철광석 생산 기업인 브라질의 한 기업이 용광로를 가동하기 위해서 화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밀림을 싹 밀어내고 화목으로 유용한 유칼립투스 나무를 심었다. 화목으로 가치가 높아 많은 이윤을 창출하였다. 그러나 유칼립투스 숲에는 다른 나무들이 많이 살게 되었다. 또한 유칼립투스의 뿌리가 깊지 않아 물을 머금을 수도 없고, 물을 저장하지 못 하니 정화 작용도 하지 못 하게 되었다. 이 지역은 자연적으로 오염된 지역이 되고 환경 자체가 유해한 환경으로 변하고 말았다.

건강한 숲에는 다양한 종의 생물이 경쟁하며 사는 숲이다. 인간 사회도 남녀노소, 빈부귀천, 형형색색의 인종과 민족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경쟁하며 새로움을 만들어 내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다.

통섭은 서로가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도록 서로의 담장을 낮춰서 새로운 합리의 가치관 속에서 서로를 건강하게 성장시킬 것이다. 6월 추모의 달에 통섭의 신앙인이 되기를 염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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