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진실을 찾아서] <1> 프롤로그 국방부보고서 ‘5·18 LMG 기관총 사망자 47명’
김희송 전남대 5·18연구소 연구교수
‘광주사태’에서 역사적 평가 거쳐 ‘5·18민주화운동’으로
2000년대 들어 극우세력 색깔론 입혀 왜곡·폄훼
새로 발굴된 5·18 군 기록물 검증·비교연구 진위 밝힐 것
2019년 03월 21일(목) 00:00

1980년 5월 전일빌딩 앞 금남로 상공에 뜬 UH-1H헬기. 국과수는 2016년 전일빌딩에서 발견된 총탄 흔적 245개를 헬기사격에 의한 탄흔으로 판정했다. <광주일보 자료사진>

5·18민주화운동은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논쟁적인 사건이다. 한국사회에서 5·18민주화운동만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에 관한 명칭의 변화는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평가와 깊은 연관이 있다.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인 ‘광주사태’에서 신군부의 정권 찬탈 음모에 맞선 영예로운 ‘민주화운동’으로 바꿔 불리는 동안 5·18민주화운동은 한국사회에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부정하고 5·18민주화운동을 북한과 연계된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주장하는 5·18왜곡 담론이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지만원을 비롯하여 일부 탈북자 단체들은 광주에 북한군 특수부대가 침투했다고 주장했다. 전두환은 2017년 4월 발간한 회고록에서 ‘광주사태’는 북한이 특수군을 투입해서 공작한 폭동이었다는 지만원의 논거를 인용하면서, 광주사태의 진실규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역설했다.

5·18민주화운동은 계엄군의 부당한 폭압에 맞선 시민들의 자발적인 저항이었다. 그러나 1980년 당시 신군부는 이를 불순분자의 배후조종에 의한 폭동이라고 주장했다. 5·18민주화운동이 누군가의 배후조종에 의한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신군부의 5·18담론은 ‘누군가’에 주목하게 하면서 자연스럽게 1980년 5월 광주에서 계엄군이 자행한 폭력의 잔혹함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수반한다. 군부의 5·18담론에서 ‘누군가’는 시대의 변화와 사회적 여건에 따라서 ‘불순분자, 폭도, 유언비어, 북한군’ 등으로 다양하게 대체 가능하다. 1980년 당시 전두환 일당이 불순분자와 유언비어를 강조했다면 최근의 왜곡 세력은 북한군에 주목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따라서 향후 진행할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과정에서는 군부 담론의 허구성을 반박하고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어야 한다.

◇ 군 기록물의 부메랑 효과 = 이번 연재는 증언에 주목했던 기존의 5·18연구와는 달리 한국사회의 민주주의 진전과 함께 발굴된 5·18관련 군 기록물의 검증과 비교 연구를 시도할 것이다. 군 기록물의 효용성을 일찍이 간파한 신군부는 군 기록물을 체계적으로 관리했다. 이렇게 관리된 5·18관련 군 기록물은 신군부의 주장을 구성하고 보증하는 토대로 기능한다. 전두환씨가 3월 11일 법정에 출두하면서 “이거 왜 이래”라고 당당하게 큰 소리 치면서 헬기사격의 진위를 하나 하나 따져보자고 주장한 것은 군 기록물에 대한 나름의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5·18관련 군 기록물의 존재는 1988∼89년 국회 광주청문회를 통해 처음 알려졌다. 광주청문회에서 군 기록물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군 기록의 신뢰성에 대한 숱한 의혹이 제기되었다. 2017년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는 군 기록물에 대한 조사를 별도로 진행한 결과, 지금까지 군이 공개한 자료이외에 비공식 자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확인했다. 또한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기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범정부차원의 대응 조직이 운영된 사실을 파악했다. 이들 왜곡 조직에 의해 군 기록이 수차례 수집 정리된 사실이 확인되면서 군 기록물의 위·변조가 누구에 의해, 어느 시점에, 어떤 이슈를 통해서 이뤄졌는지 알게 되었다.

지면에 게재한 사진은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가 5·18민주화운동 직후 교훈집으로 작성한 기록문서의 일부 내용이다. 1988∼89년 국회 광주청문회 당시 군은 보존 기한 규정에 따라서 종이 자료들은 대부분 폐기했다고 보고했다. 이런 이유로 문서 ①처럼 마이크로필름을 인화한 자료가 군의 공식 자료로 제출되었다.

그러나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 조사과정에서 육군기록정보관리단이 보관하고 있던 원본 종이자료를 발견하여 ②와 같은 내용을 확인했다. 가려진 내용의 전모를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③과 같이 참모총장 지시사항으로 “폭도 생포 목적 달성”이라는 내용이 은폐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군 기록의 위·변조의 문제는 역설적으로 군부가 위·변조를 통해서라도 숨기거나, 드러내고 싶었던 사실과 그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는 이른바 부메랑 효과로 활용할 수 있다.

◇ 헬기사격의 실체 = 전교사 교훈집의 위·변조 사실에서 확인되듯이 군 기록물은 다층적인 검증을 통해 기록물의 진실성을 엄밀하게 가려내야 한다. 헬기사격도 이러한 분석이 필요한 사건의 하나이다. 1989년 국회 청문회과정에서 조비오 신부를 비롯한 다수의 시민들은 헬기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반면, 군은 단 한번의 헬기사격도 가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헬기조종사들은 조비오 신부에 대한 고발장에서 헬기사격의 여부는 피탄지역에 대한 탄환 흔적조사, 사망자에 대한 검시 결과 등으로 확인이 가능하다며 구체적인 검증방법까지 제시했다. 특히 1980년 당시 검시 결과에 따르면 헬기의 기관총사격에 의한 사망자는 없다고 주장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2016년 전일빌딩 리모델링 과정에서 발견된 총탄 흔적을 헬기사격에 의한 탄흔으로 판정했다. 이렇게 명백하게 헬기사격에 의한 탄흔이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은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국방부 보고서 ④는 최근 입수한 1985년 문건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민간인 사망자 중에서 총상에 의한 사망자 현황을 M16 29명, LMG기관총 47명, 칼빈 37명, M1 8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1985년 국방부 보고서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LMG기관총에 의한 사망자 47명이다. 지금까지 군은 기관총에 의한 사망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러나 1985년 작성된 국방부 보고서에는 기관총에 의한 사망자가 실재한다. 보고서는 LMG기관총, 칼빈, M1의 구경이 7.62mm로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각 총기별로 구분하여 사인을 기록했다. LMG기관총의 구경은 5·18당시 출동한 헬기에 장착된 기관총의 구경과 일치한다. 따라서 LMG기관총에 의한 사망자 47명은 500MD헬기의 M134미니건 또는 UH-1H헬기의 M60기관총에 의한 사망자로도 추정할 수 있다.

LMG기관총에 의한 사망자 숫자가 명기된 국방부의 보고서는 제125회 임시국회 답변을 위해 작성되었다. 그러나 국회에 제출한 보고서 내용은 국방부 보고서 ⑤와 같이 LMG기관총에 의한 사망자를 기타로 분류하여 기관총 사망자가 없는 것처럼 보고했다. 이러한 내용의 변화는 1985년 언론에 헬기사격이 처음 보도되면서 당시 5·18 대응조직으로 결성된 80위원회가 향후 문제가 될 내용을 미리 없앤 것으로 보인다.

이번 연재는 군 기록물에 대한 분석을 통해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과 은폐의 역사를 살펴보고, 현재까지 쟁점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5월 18일 전남대학교 최초 충돌을 비롯하여 5월 20∼21일 광주역 발포사건, 5월 21일 도청 앞 집단 발포 및 헬기사격, 5월 21∼22일 이른바 광주교도소 습격설, 5월 22일 국군통합병원 확보작전, 5월 27일 상무충정작전 등의 주요 사건에 관한 실체적 진실을 파악할 계획이다. 원고는 매월 한 차례 게재된다. 필자의 능력 부족과 자료의 한계로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사건은 군 관계자의 제보와 독자 여러분의 의견 제시를 통해 지속적으로 규명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hesal@hanmail.net

김희송 교수
[김희송 교수 프로필]

전남대 5·18연구소에서 5·18항쟁과 지역시민사회운동을 연구하고 있다. ‘국방부 5·18 특별조사위 조사관’을 지냈다. 연구물로는 ‘5·18민주화운동의 국제적 비교와 시민의식’(공저), ‘5·18항쟁시기 군부의 5·18담론’, ‘5·18민주화운동의 재구성: 계엄군의 사격행위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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