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도 깨야 하는 침묵의 카르텔
2019년 01월 22일(화) 00:00

[유지나 동국대 교수·영화평론가]

새해가 되면 우리는 양력과 음력 두 차례에 걸쳐 복을 주고받는 인사를 나눈다. 관계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정겨운 관습이다. 록 밴드 ‘퀸’의 고향인 영국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큰 대중적 인기를 얻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2018, 브라이언 싱어)가 해외 특집 기사에 나올 정도로 대단한 기록을 세운 것도 기억을 먹고 사는 문화적 관습의 힘을 보여 준다.

새해와 함께 밀물처럼 다가온 체육계 미투 릴레이도 기억의 현재진행형이다. 그런데 며칠 전 ‘반복되는 미투 운동이 지겹다’라는 일부 반응을 근거로 인용하며 ‘미투 피로’를 제목으로 내건 언론 보도를 발견하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지구촌에 자리한 한국의 사회 문화 관습과 기억 코드는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 새삼 돌아보게 만든다.

2018년부터 가해자 실명을 거론하며 제기된 문화 예술계 미투 파장은 단기간에 청산될 문제가 아닌 오랜 관행이란 점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런 병든 관행 문제를 담당할 전문 기관은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사실 체육계 미투 파장은 이미 예고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지구촌 미투 운동을 촉발한 미국 영화계 성폭행 고발 사건이 발생한 2017년 10월 이전에 한국 체육계에서 미투 운동은 이미 벌어졌기 때문이다

지난 2016년 10월 초등학교 시절 테니스 코치의 성폭행 사건을 고발한 김은희 테니스 코치는 오랜 투쟁 끝에 가해자의 10년 징역형을 끌어낸 바 있다. 그때 잠잠했던 언론은 빙상 쇼트트랙 심 선수가 2019년 1월 8일 조재범 전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당했던 성폭행을 고발하면서 조금씩 침묵을 깨기 시작했다. 그녀는 당시 미성년자인 17세였다. 언론이나 체육계의 침묵 깨기가 금메달을 딴 엘리트 선수에 대한 배려로 이해하고 넘어가기엔 아픈 현실이다.

그 파장에 용기를 얻은 전직 유도 선수 역시 2018년 경찰 신고를 해도 지지부진한 수사에 저항해 신분을 공개한 뒤 고교 시절(2011년~2015년) 코치의 ‘따까리’ 노릇을 하며 당했던 성폭행을 고발했다. 처음에는 가해자 실명이 ‘A 모 씨’로 나와 오히려 ‘가해자 중심 인권 보호인가’라는 의혹 속에 피해자 이름을 붙인 성폭행 사건으로 불렸다. 이런 적반하장식 상황에 공분한 대중적 요구로 이젠 가해자 실명 ‘손 모 씨’로 부분적 실명이 공개되는 변화가 일어나는 중이다. 이어 태권도 분야에서도 성폭행 사건이 고발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젊은 빙상 연대’에서 고교생이 포함된 성폭행 피해 사례 공개를 예고하고 있다.

기이한 침묵의 카르텔을 목격하는 와중에 AP통신이 2018년 미국 스포츠 뉴스 1위로 선정한 체육계 미투 운동의 여파가 떠오른다. 미국 체조 대표 팀 주치의였던 래리 나사르가 지난 30여 년에 걸쳐 미성년 체조 선수들을 성추행·성폭행한 사실로 2016년 8월 고발당했다. 재판 중이던 이 사건에 2017년 영화계 미투 운동 열기가 전해져 2018년 1월부터 ‘체조 여왕’ 시몬 바일스를 비롯해 150여 명 이상의 전·현직 대표 선수들이 나사르의 성추행·성폭행을 증언하면서 침묵을 깼다.

그 결과 연방 재판에서 나사르는 175년형 선고를 받으면서 2018년 미국 체육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성과로 기록됐다. 이런 범행을 알면서도 그간 침묵해 온 미국 체조협회는 비판을 받았고, 스콧 블랙문 미올림픽위원회(USOC)위원장, 앨런 애슐리 USOC 경기 향상 책임자 등 체육계 고위급 인사들이 연이어 사퇴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중이다. 침묵의 카르텔은 한국 체육계만의 현실은 아니라고 위로받기보다 그 대가로 치르는 공적 처벌과 사회적 책임감을 동병상련 사태로 참조해 볼 필요가 있다.

현재진행형인 과거의 아픈 기억이 저마다의 사정으로 침묵 속에 갇혀 있었다. 그러다가 이제 그 침묵이 조금씩 깨져 나가는 중이다.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피해자보다 가해자 실명 공개가 더 중요하며 그것이 피해자 인권 보호이다. ‘위더스’(with us) 운동 또한 미투 운동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며 진행 중이다.

그런 의미에서 ‘퀸’이 라이브 공연 말미에 관중과 함께 부르며 열기를 나누는 ‘우리는 챔피언’(We are the champions)의 가사가 전·현직 선수들, 그리고 모든 피해자들을 격려하는 응원가처럼 들려온다. “난 절대 지지 않아/ 우린 챔피언이잖아, 나의 친구들아/ 우린 끝까지 계속 싸울거니까…./ 패배자에게 남겨진 시간이란 없어, 우린 이 세상의 챔피언이니까” 인생판 경기에서 패배자란 없기에 이 노래는 시대와 세대를 넘어 작동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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