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재의 세상만사] 영화 ‘말모이’의 감동과 여운
2019년 01월 18일(금) 00:00
“꽃아 꽃아 아들 꽃아 오월의 꽃아/…/ 망월동에 너의 넋이 쓰러졌어도/ 꽃아 꽃아 아들 꽃아 다시 피어나라.” ‘노래하는 스님’으로 유명했던 정세현(법명: 범능)이 생전에 불렀던 ‘꽃아 꽃아’란 노래다. 정세현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은 이후 스님이 되기 전까지 한때 운동권 가요 작곡자이자 민중가수로 활동했다. 이 노래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언론 노조 활동을 하던 1980년대 말이었다. 그때 조합원들은 놀이 패를 통해 꽹과리나 장구 치는 법을 배웠다. 또한 민중가요를 함께 부르며 전의(戰意)를 다지기도 했다. 한데 당시 노조의 책임을 맡고 있던 나 또한 이 노래를 어깨너머로 배웠던 것이다.

“꼬다 꼬다 아들 꼬다 오월의 꼬다” 구슬픈 국악풍의 이 노래를 우리는 늘 이렇게 불렀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다. 어느 날 혼자서 노래를 흥얼거리다 갑자기 어떤 의문이 드는 것이었다. “꼬차 꼬차 아들 꼬차 오월의 꼬차”로 소리 내어 불러야 하는 것은 아닐까? 혹시 ‘꼬다’는 ‘꼬차’의 잘못된 발음 아닐까? ‘앞 음절의 받침이, 모음으로 시작되는 조사 따위에 결합될 경우, 뒤에 오는 음절 첫소리로 옮겨 발음한다’는 표준 발음 규정대로라면 아, ‘꼬차’로 해야 맞겠구나.

그렇다면 서울 사람들은 과연 이를 어떻게 발음하고 있는 걸까? 그 오랜 궁금증은 최근에야 풀렸다. 수도권 주민 1200명을 대상으로 ‘꽃아’란 말이 호격조사 ‘아’와 결합될 때 어떻게 발음하는지를 조사한 결과(국립국어원 ‘새국어 소식’, 2005년 5월)를 뒤늦게 접하게 된 것이다. 놀랍게도 ‘꼬사’로 발음하는 이들이 59%로 가장 많았다. ‘꼬차’로 발음하는 이들은 25%로 그 뒤를 이었고, 10% 정도는 전라도 사람들처럼 ‘꼬다’로 발음한다고 했다.

여기서 잠깐, ‘표준 발음법’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그건 다름 아니라 ‘한 나라에서 공용어로 쓰는 언어의 말소리를 규정한 규범’이다. 표준 발음이 필요한 이유 역시 표준어가 필요한 이유와 다르지 않다. 출신 지역이나 나이에 따라 사람들은 같은 말도 조금씩 다르게 발음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표준어나 표준 발음이나 모두 서로 간의 의사소통을 위한 사회적인 약속이라 할 수 있다. 우리말 자모에 각기 붙여진 이름도 마찬가지다. 기역 니은 디귿 리을 미음…. 한데 기역은 왜 ‘기윽’이라 하지 않았을까? 디귿은 왜 ‘디?’이 아니며 시옷은 왜 ‘시읏’이 아닐까. 이는 1527년에 간행된 최세진의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 비롯된다.

‘기역’은 왜 ‘기윽’이 아닐까

훈몽자회는 자모의 명칭을 한자의 음(音:소리)과 훈(訓:뜻)을 이용하여 표기했다. 기역(其役), 니은(尼隱), 디귿(池末), 리을(梨乙), 미음(眉音), 비읍(非邑), 시옷(時衣), 이응(異凝) 등으로. 신라 시대 이두(吏讀)와 같은 원리의 표기다. 한데 ‘윽’이라고 표기할 마땅한 한자의 음이 없으니 그와 비슷한 ‘역’(役)을 취했고, ‘?’이 없으니 그와 비슷한 ‘말’(末, 끝)의 뜻을 빌려 이름을 삼았다. 또한 ‘읏’이 없으니 그와 비슷한 ‘의’(衣, 옷)의 뜻을 빌린 것이다.

물론 최세진 자신은 ‘기윽’ ‘디?’ ‘시읏’이라고 읽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후세 사람들은 훈몽자회에 한자로 적힌 자모의 명칭을 그대로 한글로 옮길 수밖에 없었고, 그래 ‘기역’ ‘디귿’ ‘시옷’으로 굳어진 것이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우리와는 달리 ‘기윽’ ‘디?’ ‘시읏’으로 읽는다. 물론 이건 작은 차이에 불과하지만, 오랜 남북 분단의 세월은 우리말과 글의 이질화를 심화시켰다.

지난해 평창올림픽 개막식 참가차 온 북한 대표단의 청와대 오찬에서 남북 언어 차이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남측의 임종석이 “오징어와 낙지는 남북한이 정반대더라”라고 하자 북측의 김여정이 “그것부터 통일해야겠다”고 말해 웃음이 터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남북 언어에 대한 통일 노력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겨레말큰사전 편찬 사업이 바로 그것이다.

이 사업은 1989년 평양을 방문한 문익환 목사가 ‘통일국어대사전’ 공동 편찬을 제안했고, 김일성 주석이 이에 동의해 처음 씨앗이 뿌려졌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아래서 부침을 거듭하다 2016년 중단되고 말았다. 그리고 남북 화해의 훈풍이 불던 지난해 비로소 남북한 관계자들이 만나 겨레말큰사전 편찬 회의를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사전을 만드는 작업은 참으로 지난한 작업이다. 평상시에도 그러하려니와 우리말 말살 작업이 가혹하게 진행되던 일제 강점기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했으니까. 우리말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분이 한힌샘 주시경(1876~1914) 선생이다. 선생은 나라의 혼을 살리고자 1911년 최초의 우리말 사전 ‘말모이’ 편찬을 시작했으나 이른 죽음으로 끝을 보지 못했다.

목숨 걸고 지켰던 우리말

‘말모이’란 ‘낱말들의 모음’이란 뜻으로 사전을 가리키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선생의 뜻을 이어받은 조선어학회는 1929년 ‘조선어사전’ 편찬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1942년 일제의 탄압으로 회원 수십 명이 고초를 겪고 이윤재·한징은 감옥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했다.

당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복역한 바 있는 외솔 최현배(1894~1970) 선생은 언어 민족주의에 입각해 맞춤법을 통일하고 표준말을 제정하는 데 모든 것을 바쳤다. 선생은 ‘우리 말본’ 저술에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는데, 강의를 나갈 때마다 부인에게 ‘불이 나면 이 원고부터 옮기라’고 했다고 한다. 나중엔 그것조차 안심이 되지 않았던지 아예 마당에 독을 묻고 그 속에 원고를 넣어 둔 것으로 전해진다.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우리말을 지키고자 했던 수많은 선각자들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마치 공기처럼 고마운 줄도 모른 채 우리말을 사용하고 있다. 선인들의 이런 희생의 역사가 없었더라면 지금 우리는 일본어를 국어로 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 ‘말모이’란 제목의 영화를 보면서, 오랜만에 많이 웃고 많이 울었다. 영화는 사전 편찬 사업에 얽힌 고난의 행로 가운데 일제 탄압이 가장 심했던 시기를 허구적 서사에 의탁하여 때로는 감동적으로 때로는 익살스럽게 그려 내고 있다. 우리말을 살리기 위한 애국자들의 목숨을 건 투쟁과 노력을 한 편의 영화로 만날 수 있어 행복했다. 그리고 한국 상업 영화계 풍토에서는 쉽사리 손대기 어려웠을 법한데, 그럼에도 이런 좋은 영화를 만들어 준 감독에게 고마웠다. “말과 글을 잃으면 민족도 멸망한다.” 주시경 선생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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