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들의 따스한 숨결이 느껴지는 살아있는 민속박물관
전라도 1000년 호남을 바로 세우자
2017년 07월 04일(화) 00:00
순천 낙안(樂安)읍성



김형주



백성을 즐겁고 편안하게 다스린다는 웅숭깊은 애민정신이 깊게 스며있는 낙안읍성은 고려 후기 남해안 일대에 왜구들이 자주 출몰하자 1397년에 낙안 출신의 절제사(節制使)인 김빈길(金贇吉)이 흙으로 성곽을 쌓은 데서 비롯되었다. 이후 ‘세종실록’을 살펴보면 1424년 9월부터 성벽 재료를 돌로 고쳐 쌓으면서 원래의 규모보다 크게 확장되었으며 1450년에 마무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벽의 둘레는 1385m에 이르며 동문터의 남쪽 부분이 가장 완벽히 남아있다. 높이는 4.2m이고, 위쪽 너비와 아래쪽 너비는 각각 3∼4m, 7∼8m이다. 아래쪽에 커다란 석재를 이용하여 쌓아 올리면서 틈새마다 작은 돌을 쐐기박음 하였으며, 위쪽으로 갈수록 석재의 크기를 줄였다. 또한 성문은 3곳이었는데 옹성을 두지 않았고, 성문 옆에 쌓은 네모난 적대(敵臺)는 4개만 설치되었다.

성 안에는 우물 2곳과 연못 2곳이 있었으며, 성 밖으로 성벽을 에둘러 판 해자(垓子: 원형의 도랑)는 설치되지 않았다. 병자호란 때 크게 활약한 임경업 장군이 낙안군수로 재직하던 시기인 1626년 성을 새로 수축하여 성문을 보호하는 옹성이 설치되었고, 무너진 여장도 다시 쌓았다. 현재 남아 있는 읍성의 모습은 조선 초기 성곽의 형태를 고스란히 보여 준다.

읍성은 낮은 구릉을 포함한 평지에 동서 방향의 긴 장방형으로 자리하고 있다. 동문과 서문 사이를 중심축으로 하여, 북쪽부분에는 동헌, 내아, 객사, 낙민루, 낙민관 등의 관아건물이 배치되어 있고 남쪽부분에는 민가, 대장간, 장터, 큰샘 등 민간 건축물이 자리잡고 있다. 동문(樂豊樓)과 남문(雙淸樓)은 온전하게 유지되고 있으나 낙추문(樂秋門)으로 불린 서문은 터만 남아 있으며, 옹성은 남문터와 서문터에서만 흔적을 볼 수 있다.

적대는 기록에 전해지는 대로 동문터 좌우와 동북쪽·동남쪽 모서리에 각각 하나씩 있다. 낙안 객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궁실조에 따르면 1450년 군수 이인(李茵)이 건립하였다고 하나, 1547년에 부사 오성(吳誠)이 건립하였다고 전하기도 한다. 몇차례의 중수를 거쳐 1909년 이후 낙안초등학교 교실로 사용되었으며 1983년에 개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민가지역에는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박의준 가옥 등의 전통민가 9동을 비롯하여 290여 채의 초가집에 120세대 300명 남짓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대장간과 감옥 등의 옛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민속한마당, 낙안민속문화축제, 낙안읍성 전통음식축제가 개최되는 등 살아있는 민속박물관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고창읍성, 해미읍성과 함께 보존상태가 양호한 조선시대 읍성 가운데 하나로 대표적인 성곽마을이다. 낙안읍성은 1983년 사적 302호로 지정됐으며, 인근에는 출판인 한창기 선생이 평생 모은 6500여점의 소중한 유물을 수장하는 뿌리깊은나무박물관이 자리한다.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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