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탄생 100주년 <5> 일본 유학시절
식민지 유학생의 비애·저항 … 여전한 울림으로
2017년 06월 26일(월) 00:00

윤동주 시인이 릿교대학에서 한 학기를 보내고 편입했던 도시샤대학은 기독교 정신과 국제주의에 입각한 건학 이념을 기치로 내건 학교다. 〈도시샤대학 홈페이지〉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다. 그해 전시학제 단축으로 12월 27일 연희전문을 졸업한 윤동주 앞에는 암울한 미래가 놓여 있었다. 집안 어른들은 윤동주의 진로를 두고 깊은 고민에 빠진다. 그들은 고종사촌이었던 윤동주와 송몽규를 일본에 유학 보내기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일본 유학의 전제 조건은 창씨개명이었다. 졸업증명서와 일본 대학 입시에 필요한 서류에는 창씨 계명한 이름이 올라 있어야 했다.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 문학을 공부하고자 했던 윤동주에게는 ‘굴욕’의 현실 그 자체였다(현재 연세대에 보관된 연희전문대 학적부에는 윤동주와 송몽규의 창씨 개명한 이름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얼골이 남어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나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추정하건데 윤동주는 창씨개명을 제출하기(1942년 1월 29일) 전, 시 ‘참회록’을 쓴 것으로 보인다. 시가 쓰인 날짜(1942년 1월 24일)가 5일 빠르다. 시인은 “이다지도 욕될가”라는 표현으로 참회와 저항의 상반된 감정을 드러냈다. 뼈저린 고통과 깊은 성찰이 투영된 ‘참회록’은 시공을 초월해 오늘에까지 울림을 준다.

그렇게 윤동주는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의 나이 25세 때인 1942년이었다. 송몽규는 교토제국대학 서양사학과에, 윤동주는 릿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북간도 용정이 고향인 윤동주는 부산행 기차와 일본행 관부연락선을 탔을 것이다. 그리고 교토까지 기차로 이동하는 번거로운 여행을 감행했다.

릿교대학에서 한 학기를 보낸 윤동주는 이후 도시샤대학에 편입한다. 교토제국대학에 다니는 송몽규와 가까운 대학으로 옮기고 싶었던 모양이다. 도시샤대학은 기독교 정신과 국제주의에 입각한 건학 이념을 바탕으로 많은 인재를 길러낸 대학으로 알려져 있다. 윤동주 시인 외에도 이곳은 정지용, 오상순 시인 등이 한국 현대시문학사의 거장들이 거처간 미션계 학교로도 유명하다.

도시샤대학은 1875년 그리스도교 전도사이자 교육자인 니지마 조(新島襄·1843∼1890)에 의해 설립됐으며 당시의 학교명은 도시샤에이학교(同志社英學校)였다. 니지마 조는 해외에서 학위를 취득한 최초의 일본인으로 알려질 정도로 교육에 대한 남다른 철학을 지닌 학자였다.

2011년 현재 도시샤대학에는 2만8000명의 학생과 800여 명의 교수가 재직하고 있다. 신학부, 문학부, 사회학부, 법학부 등 11개 학부 33개 학과, 대학원과정에는 15개의 연구과 29개 전공이 개설돼 있다. 광주일보와 함께 ‘윤동주 서시 문학상’을 제정한 계간 ‘시산맥’은 지난해 6월 20여 명의 시인들이 도시샤대학을 방문했다. 윤동주 시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의미있는 공간을 찾아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문정영 ‘시산맥’ 대표는 “윤동주는 시대의 고뇌를 깊은 성찰과 뼈저린 괴로움으로 승화했다”며 “‘서시문학상’ 제정을 계기로 일본에서의 시인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것은 후배시인들로서 당연히 거쳐야 할 통과의례”라고 밝혔다.

140년 이상의 역사가 깃든 교정은 긴 역사만큼이나 격조있는 정적이 감돈다. 오래된 나무에서 배어나오는 수목의 향은 깊고 잔잔하다. 전통의 아우라가 빚어내는 그윽함이 오래도록 여운을 준다. 도시샤대학 교정 한켠에는 윤동주 추모시비가 있다. 도시샤대학을 졸업한 재일동포들이 주축이 돼 1995년 2월 15일에 제막했다고 한다. 시비 앞에는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 유고시집과 사진이 놓여 있다. 20여 명의 시인 일행은 시비 앞에서 헌화와 묵념을 했다. 광주일보 신춘문예(2016) 출신 진혜진 시인은 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를 낭송했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가,/ ……/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시비 앞에 놓인 사진 속 윤동주의 표정은 평온하다. 아니 “선량하다”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 마치 한 마리의 사슴처럼 그는 순진구무구한 표정으로 한국에서 온 시인들을 맞고 있다. 그의 미소가 짧은 생애를 온전히 보여주지는 못할 것인데, 웃음인듯 울음인듯 보이는 얼굴은 더할 수 없는 쓸쓸함과 아픔으로 다가온다.

강의실은 윤동주의 20대의 흔적이 있을지 모른다. 진혜진 시인은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복도에서 바라본 강의실에는 그의 시 속에 나오는 노교수의 강의만이 있었다”며 “시대적 위험에도 불구하고 불운한 조국의 운명을 시로 드러냈던 그를 조국은 끝내 지키지 못했다”고 말했다.

아마도 20대의 청년 윤동주는 강의실에 앉아 영문학을 공부하고 시를 썼을 것이다. 그는 없고 모든 것은 그대로다. 당시나 지금이나 세상은 별반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윤동주의 ‘참회’는 시간을 거슬러 오늘의 우리에게, 아니 ‘치욕’을 값싼 대가로 치환하려는 이들에게 아픈 죽비로 다가오는지 모른다.

다행히 윤동주 시비 옆에는 그의 선배 시인 정지용의 시비가 자리해 그마마 외로움을 덜어준다. 정지용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적도 없이!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박성천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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