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탄생 100주년]<3> 연희전문대서 문학 꿈 영글다
2017년 05월 29일(월) 00:00 가가
푸르름 가득한 교정, 문학청년 詩魂 고스란히…


연희전문 창립 초기 공이 큰 미 남감리교 총무 핀슨 박사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핀슨 홀(Pinson Hall)은 후일 기숙사로 쓰였다. 현재 2층에는 윤동주기념관이 있는데, 윤동주는 입학 후 이곳에서 생활하며 문학에 정진했다.
늦봄과 초여름 사이, 캠퍼스는 푸른 신록과 젊음의 열기로 가득했다. 떠나가는 봄의 끝자락을 붙잡기라도 하듯 계절은 여름 문턱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한다.
연세대 정문에 들어서자 인도 양쪽으로 도열한 가로수가 시선을 끈다. 시원하게 내뻗은 푸른 나무들은 푸른 청춘들을 상징할 터다. 비록 취업과 진로 문제로 예전만은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캠퍼스엔 활기가 감돈다. 많은 이에게 청춘의 한때가 소중한 페이지로 기억되는 것은 푸르른 젊음 때문일 것이다.
수필가 민태원(1894∼1935)은 ‘청춘예찬’에서 “청춘(靑春)!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라고 했다. 나아가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라고 정의했다. 청춘이 겸비해야 될 이성과 지혜는 ‘차가운 불’, ‘날카로운 곡선’과 같아야 한다는 의미다. 약동하지만 가볍지 않은, 단단하지만 결코 유연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늘에 돌아보는 젊음의 상과도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그러나 시대를 초월해 울림을 주는 청춘의 표상은 나를 내려놓은 자리에 ‘우리’를 들여놓는 것인지 모른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가슴 깊이 아파하며 가혹하게 스스로를 채찍질 했던 이가 있다. 청년 윤동주. 그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는 삶을 희구했던 순수한 젊은이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참지식인이자, 참문인이었다.
연세대는 윤동주 시인이 대학생활을 보냈던 곳이다(당시의 학교 명칭은 연희전문대였다). 윤동주는 1938년부터 1941년까지 이곳에서 청춘의 한 때를 보냈다. 그가 고종 사촌인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에 입학한 것은 1937년이었다.
대학 시절 윤동주는 문학에 대한 꿈을 점차 현실화한다. 좋아했던 수업은 최현배의 조선어 시간과 이양하의 영문학 시간이었다고 전해진다. 우리말에 대한 사랑과 문학에 대한 열정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입학하면서부터 윤동주는 기숙사에서 생활한다. 사촌인 송몽규와 영어에 능통했던 강처종과 함께 한방을 썼다고 한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교정을 거닐거나 인근의 동산을 산책하며 시심을 다듬었다. 정지용과 백석, 김영랑의 시를 읽었고 외국 시인으로는 라이너마리아 릴케, 프랑시스 잠 등의 작품에 심취했다.
당시 문학청년 윤동주의 시재(詩才)를 알 수 있는 일화가 윤동주기념관에 기록돼 있다. 그가 천상 시인이었음을 방증하는 에피소드다.
“동주는 교실과 서재와는 구별이 없는 친구다. 달변과 교수 기술과 박학으로 명강의를 하시는 정인섭 선생님에게는 누구나가 매혹되는데, 학기 말 시험에 엉뚱하게도 작문 제목을 하나 내 놓고 그 자리에서 쓰라는 것이다. 밤새워 해온 문학개론의 광범위한 준비가 다 수포로 돌아갔다. 억지 춘향으로 모두 창작기술을 발휘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필자 역시 진땀을 빼며 써냈더니 점수가 과히 나쁘지 않아 천만다행이라고 안심하고 말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동주는 바로 그 제목을 그 글을 깨끗이 옮겨서 신문의 학생란에 발표하였다. 제목은 ‘달을 쏘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 모두가 말없는 동주에게 멋지게 한 대 맞고 말았다. 이렇게 보면 그는 교실과 하숙방, 그리고 생활 전부가 모두 창작의 산실이었다.” (유영, ‘연희전문시절의 윤동주’, 나라사랑23, 126쪽)
윤동주는 1939년 1월 23일자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 ‘달을 쏘다’를 기고한다. 2월 6일자에 시 ‘아우의 인상화’를, 같은 해 10월 17일에는 ‘유언’을 윤주(尹柱)라는 이름으로 발표한다.
윤동주가 기거했던 기숙사는 윤동주 시비가 있는 동산 인근에 자리한다. 서양의 근대 건축 양식을 지닌 기숙사는 연희전문 창립 초기에 공이 큰 미 남감리교 총무 핀슨 박사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다. 핀슨 홀(Pinson Hall)로 명명된 건물은 1922년 학생 기숙사로 준공됐으며 1938년 연희전문에 입학한 윤동주는 이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문학에 정진했다.
현재 이곳 2층에는 윤동주기념관이 있다. 학교법인 사무처도 핀슨 홀 건물에 입주해 있는데, 관계자는 “내년 사무처가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하면 건물 전체가 윤동주 기념관으로 새롭게 꾸며질 것”이라고 말했다.
윤동주기념관에는 당시 시인이 생활했던 기숙사 방이 재현돼 있다. 시를 쓰고 책을 읽던 나무 책상과 나무 걸상, 그가 읽었을 책 등이 비치돼 있다. 시인의 자화상으로 보이는 옛그림도 소품처럼 드리워져 있다. 공간은 정답고 아늑해 시인의 천품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연세대는 윤동즈 시정신과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지난 2000년 11월 27일 윤동주기념사업회를 조직했다. 기념사업회는 “윤동주가 떠난 지 반백년이 지났지만, 그 시대가 주는 절망 속에서 그의 영혼의 내면에 자리한 기독교적 가치관과 나라사랑이 그의 저항의 원동력이었으며 그의 삶의 궤적이요, 지표였다”며 “한국인이 제일 사랑하는 시인인 윤동주 동문의 기독교 정신과 민족사랑 정신을 되새기어 그의 문학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한국 시문학을 부흥시키기 위하여 설립하였다”고 취지를 설명한다.
윤동주기념사업회에서는 시인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특히 올해는 탄생 100주년을 맞아 윤동주 시인 추모식(2월)과 기념음악회(5월)를 개최했다. 앞으로 윤동주시문학상,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국학연구원과 연변대학공동학술대회 등 의미있는 행사들을 개최할 예정이다.
윤동주 시비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1968년 연세대 총학생회가 건립한 시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가 이 동산을 거닐며 지은 구슬 같은 시들은 암흑기 민족문학의 마지막 등불로서 겨레의 가슴을 울리니 그 메아리 하늘과 바람과 별과 더불어 길이 그치지 않는다”
화병에 꽂힌 꽃송이가 하오의 볕을 받아 처연하게 빛난다. 어디선가 날아온 비둘기 몇 마리가 주위를 배회하다 숲으로 사라진다. 그는 어디에 있는가. 그의 시혼은 이곳 동산 아니 교정 어딘가를 날며 시를 읽고 있을지 모른다. 시비 아래 부서지는 햇살을 바라보며 우리 시대 참 시인의 모습을 잠시 묵상한다.
/글·사진=박성천기자 skypark@
연세대 정문에 들어서자 인도 양쪽으로 도열한 가로수가 시선을 끈다. 시원하게 내뻗은 푸른 나무들은 푸른 청춘들을 상징할 터다. 비록 취업과 진로 문제로 예전만은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캠퍼스엔 활기가 감돈다. 많은 이에게 청춘의 한때가 소중한 페이지로 기억되는 것은 푸르른 젊음 때문일 것이다.
연세대는 윤동주 시인이 대학생활을 보냈던 곳이다(당시의 학교 명칭은 연희전문대였다). 윤동주는 1938년부터 1941년까지 이곳에서 청춘의 한 때를 보냈다. 그가 고종 사촌인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에 입학한 것은 1937년이었다.
대학 시절 윤동주는 문학에 대한 꿈을 점차 현실화한다. 좋아했던 수업은 최현배의 조선어 시간과 이양하의 영문학 시간이었다고 전해진다. 우리말에 대한 사랑과 문학에 대한 열정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입학하면서부터 윤동주는 기숙사에서 생활한다. 사촌인 송몽규와 영어에 능통했던 강처종과 함께 한방을 썼다고 한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교정을 거닐거나 인근의 동산을 산책하며 시심을 다듬었다. 정지용과 백석, 김영랑의 시를 읽었고 외국 시인으로는 라이너마리아 릴케, 프랑시스 잠 등의 작품에 심취했다.
당시 문학청년 윤동주의 시재(詩才)를 알 수 있는 일화가 윤동주기념관에 기록돼 있다. 그가 천상 시인이었음을 방증하는 에피소드다.
“동주는 교실과 서재와는 구별이 없는 친구다. 달변과 교수 기술과 박학으로 명강의를 하시는 정인섭 선생님에게는 누구나가 매혹되는데, 학기 말 시험에 엉뚱하게도 작문 제목을 하나 내 놓고 그 자리에서 쓰라는 것이다. 밤새워 해온 문학개론의 광범위한 준비가 다 수포로 돌아갔다. 억지 춘향으로 모두 창작기술을 발휘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필자 역시 진땀을 빼며 써냈더니 점수가 과히 나쁘지 않아 천만다행이라고 안심하고 말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동주는 바로 그 제목을 그 글을 깨끗이 옮겨서 신문의 학생란에 발표하였다. 제목은 ‘달을 쏘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 모두가 말없는 동주에게 멋지게 한 대 맞고 말았다. 이렇게 보면 그는 교실과 하숙방, 그리고 생활 전부가 모두 창작의 산실이었다.” (유영, ‘연희전문시절의 윤동주’, 나라사랑23, 126쪽)
윤동주는 1939년 1월 23일자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 ‘달을 쏘다’를 기고한다. 2월 6일자에 시 ‘아우의 인상화’를, 같은 해 10월 17일에는 ‘유언’을 윤주(尹柱)라는 이름으로 발표한다.
윤동주가 기거했던 기숙사는 윤동주 시비가 있는 동산 인근에 자리한다. 서양의 근대 건축 양식을 지닌 기숙사는 연희전문 창립 초기에 공이 큰 미 남감리교 총무 핀슨 박사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다. 핀슨 홀(Pinson Hall)로 명명된 건물은 1922년 학생 기숙사로 준공됐으며 1938년 연희전문에 입학한 윤동주는 이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문학에 정진했다.
현재 이곳 2층에는 윤동주기념관이 있다. 학교법인 사무처도 핀슨 홀 건물에 입주해 있는데, 관계자는 “내년 사무처가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하면 건물 전체가 윤동주 기념관으로 새롭게 꾸며질 것”이라고 말했다.
윤동주기념관에는 당시 시인이 생활했던 기숙사 방이 재현돼 있다. 시를 쓰고 책을 읽던 나무 책상과 나무 걸상, 그가 읽었을 책 등이 비치돼 있다. 시인의 자화상으로 보이는 옛그림도 소품처럼 드리워져 있다. 공간은 정답고 아늑해 시인의 천품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연세대는 윤동즈 시정신과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지난 2000년 11월 27일 윤동주기념사업회를 조직했다. 기념사업회는 “윤동주가 떠난 지 반백년이 지났지만, 그 시대가 주는 절망 속에서 그의 영혼의 내면에 자리한 기독교적 가치관과 나라사랑이 그의 저항의 원동력이었으며 그의 삶의 궤적이요, 지표였다”며 “한국인이 제일 사랑하는 시인인 윤동주 동문의 기독교 정신과 민족사랑 정신을 되새기어 그의 문학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한국 시문학을 부흥시키기 위하여 설립하였다”고 취지를 설명한다.
윤동주기념사업회에서는 시인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특히 올해는 탄생 100주년을 맞아 윤동주 시인 추모식(2월)과 기념음악회(5월)를 개최했다. 앞으로 윤동주시문학상,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국학연구원과 연변대학공동학술대회 등 의미있는 행사들을 개최할 예정이다.
윤동주 시비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1968년 연세대 총학생회가 건립한 시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가 이 동산을 거닐며 지은 구슬 같은 시들은 암흑기 민족문학의 마지막 등불로서 겨레의 가슴을 울리니 그 메아리 하늘과 바람과 별과 더불어 길이 그치지 않는다”
화병에 꽂힌 꽃송이가 하오의 볕을 받아 처연하게 빛난다. 어디선가 날아온 비둘기 몇 마리가 주위를 배회하다 숲으로 사라진다. 그는 어디에 있는가. 그의 시혼은 이곳 동산 아니 교정 어딘가를 날며 시를 읽고 있을지 모른다. 시비 아래 부서지는 햇살을 바라보며 우리 시대 참 시인의 모습을 잠시 묵상한다.
/글·사진=박성천기자 sky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