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전북 옥구 출신 김금선씨
2016년 01월 01일(금) 00:00 가가
소아마비 놀림받던 동생 가르치려 독일에 … 1인 3역 ‘억척女’
66년부터 76년까지 우리나라가 서독에 파견한 1만 여명의 간호사들. 그들이 독일로 간 이유는 다양하다. 가난해서, 해외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친구 따라 강남 가느라, 그 외 개인적인 이유들로 그녀들은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가난했지만 정겨웠던 고향을 등진 타국의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눈물도, 웃음도 이제 인생의 뒤편으로 멀어져가고 이제 그녀들은 인생의 종착역을 맞이하고 있다.
2016년 파독 50년을 맞아, 지금까지 알아왔던 공식적인 파독의 스토리가 아닌, 한 개인 안에 묻혀져가는 소소한 인생의 파편을 하나하나 모아본다.
신발은 낡고 헤졌다. 노을이 바알갛게 물든 길 위에서 또 길을 찾았다. 퇴색된 풍경은 인생 아래로 사라지고, 그녀는 또 다른 생의 정류장에 멈춰 서 있다.
파독 간호사 김금선(63세). 2015년 12월을 끝으로 간호사의 삶을 마감했다. 1976년 독일에 왔을 때만 해도 죄다 선배들이었다. 이제 하나 둘 노년의 언덕에 들어서거나 생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녀 또한 현역 파독 간호사로서는 막차인 셈이다. 그녀는 팔색조다. 인생의 순간순간 새로운 변신을 꿈꿨다.
김금선은 전북 옥구에서 3남 4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천방지축 소녀였다. 할아버지 생신 때 곱사춤을 추어 사람들을 웃게 했다. 금선은 어릴 때 꿈이 많았다. 아이들을 좋아해 학교 선생님도 되고 싶었고, 고아원 원장도 꿈꿨다. 하지만 취직이 잘 된다는 간호학교를 진학했다. 대구 간호전문학교(현 대구 보건대학) 졸업 후 울산 기독병원에서 첫 병동생활을 시작했다.
1년이 되었을 때 문득 파독 간호사로 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좀 더 넓은 데서 살아보고 싶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지원서류를 보내고 꼬박 1년을 기다렸다. 보따리를 세 번이나 쌌다가 풀었고, 어머니는 고추장을 세 번이나 볶았다. 어머니는 체구는 작지만 대장부였다. 그녀가 독일에 간다고 하니, 스스럼없이 ‘가서 성공하고 오라’고 선뜻 허락했다.
“처음엔 조금 서운하긴 하더라구. 과년한 딸이 시집갈 나이에 먼 타국에 가는데 붙잡지는 못할 망정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더라니까.”
하지만 공항 입국장을 들어가며 힐끗 돌아본 금선은, 치마 자락을 움켜쥐고 우는 어머니를 보고야 말았다. 딸 앞에서는 눈물을 감춘 것이다.
사실 그녀가 독일에 온 이유는 동생 때문이었다. 남동생이 공부를 곧잘 했다. 하지만 선천성 소아마비를 가지고 있었다. 어릴 때 동네 아이들이 ‘병신’이라고 놀리면 바람막이가 되어주었다. 동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나중에 동생을 독일로 초청해 대학공부를 시켰다. 남동생은 보조기에 의지해 연세대 천문기상학과를 졸업 후 베를린 공대에서 석·박사를 취득한, 충북대 천문우주학과 김용기 교수다.
결혼할 때도 배우자 조건이 동생의 공부를 돕고 한국 가족을 돕는 것을 인정한 사람이어야 했다. 게다가 남동생이 ‘괜찮다’고 하면 더욱 ‘오케이’였다. 어쩌면 까다로울지 모르는 결혼조건인지, 서른 여덟 살이 되도록 짝을 만나지 못했다. 아이들을 좋아해 아기를 낳고 싶었던 금선은 점점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주선으로 한국에서 몇 번 선을 보곤 했지만, 외국물 먹은 여자에 대한 편견과 그녀 또한 남자를 한 번만 보고 인생을 결정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는 자신이 직접 독일에서 남자를 고르겠다고 선언했다.
베를린 노이쾰른 지역 신문에 ‘신랑감을 찾습니다’라고 광고를 냈다. 당시 동양여자에 대한 신선한 시각이 팽배해서인지 이력서가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최종 두 명이 남았고 그 때 만난 사람이 바로 지금의 남편 우베 뮌쇼 씨다. 남을 편안하게 해주고, 설득력이 있는 우베였지만, 그의 직업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땐 그 남자, 불알만 달았지 볼 게 없었어. 하하. 하지만 지금은 대 만족이야. 내가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우베 같은 남자를 어디서 만나겠어?”
다른 한인 간호사 친구들은 의사 남편도 있고, 교수도 있는데 당시 우베는 부동산 관련 소개해주는 일을 했다. 하지만 그때 독일에서 유학하며 같이 살던 남동생이 만나보고는 우베를 적극 추천했다. 결국 그녀는 우베와 결혼 계약서를 썼다. 남동생의 공부를 도울 것, 한국에 돈 보내는 것을 허락할 것, 금선이 무용하는 것을 인정할 것 등이다. 그렇게 결혼한 우베 씨는 이 약속을 지금까지도 평생 맹세로 간직한다.
금선은 독일에 오자마자 무용에 빠졌다. 83년에 베를린 간호협회 내 가야무용단 창립 초대 단장을 역임했고, 91년부터 95년까지 세종한글학교 무용지도와 97년부터 현재까지 베를린 한글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한국무용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 문화를 알려면 한글을 해야 하잖아. 그래서 전부 한국말로 가르쳤어. 설날에는 세배하는 법도 가르치고, 추석 때 송편도 만들고 아이들에게 우리 문화를 알려주는 게 얼마나 보람이 있는지 몰라.”
한글학교 때 무용을 배웠던 아이들이 자라 삼십이 넘어서 함께 북춤과 부채춤을 출 때면, 세월의 빠름을 실감하곤 한다. 2011년엔 회룡 한국무용제에서 일반부 장려상을 수상했고, 지난 2012년엔 그녀의 무용 30년을 총 망라한 ‘바람 꽃에 핀 꽃’ 무용 발표회를 열었다. 금선은 독일 한인사회 한국무용의 산 증인이자 한국 전통문화를 알리는 홀씨가 된 셈이다.
1976년, 비교적 마지막 파독 간호사로 독일에 왔지만 선배, 동료 한인 간호사들의 적극적인 호응으로 2013년엔 26대 베를린 간호협회 회장으로 추대되면서 한인 간호사들의 친목과 화합을 다지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금선은 우어반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면서도 간호협회 회장과 한글학교 무용 교사, 가야 무용단 등의 여러 일정들을 소화해내 똑순이, 억척녀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였다.
독일생활에서 가장 행복했을 때가 아이를 낳았을 때라고 이야기하는 금선은 아들 이야기를 하자 얼굴이 환해졌다가 금세 어두워졌다.
“벌써 이십 년도 훨씬 지난 일이네. 애를 셋 이상은 낳고 싶었는데 하나밖에 못 낳았어. 애가 한 살 반이 되었을 때 갑상선 암에 걸렸지 뭐야. 거기다 유방염증과 자궁에도 문제가 있었어. 항암치료 하는데 애를 더 가질 수가 있어야지. 근데 수술하고 3일이 지났는데 병원 창문 밖으로 햇빛이 비치는 거야. 그 햇빛이 얼마나 고마운지 용기가 났어. 난 이길 수 있어, 라고 생각했지.”
금선은 자신의 질병을 치료한 것은 춤이라고 말했다. 가끔 우울해지면 춤을 췄다. 금선에게 춤은 암 치료제나 마찬가지다.
“무엇이든 열정을 바치는 그 무언가가 있다면 몸 안의 독소나 질병도 사라지는 것 같어. 열정이 긍정을 키우고 그게 약이지 뭐겠어? 하하.”
금선 특유의 호탕한 웃음이 창문 밖 태양을 슬그머니 끌어들인다. 그녀에게 인생의 태양은 지금 긍정적인 이 순간, 오늘, 그리고 내일이다.
/박경란 재독 칼럼니스트 kyou723@hanmail.net
신발은 낡고 헤졌다. 노을이 바알갛게 물든 길 위에서 또 길을 찾았다. 퇴색된 풍경은 인생 아래로 사라지고, 그녀는 또 다른 생의 정류장에 멈춰 서 있다.
파독 간호사 김금선(63세). 2015년 12월을 끝으로 간호사의 삶을 마감했다. 1976년 독일에 왔을 때만 해도 죄다 선배들이었다. 이제 하나 둘 노년의 언덕에 들어서거나 생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녀 또한 현역 파독 간호사로서는 막차인 셈이다. 그녀는 팔색조다. 인생의 순간순간 새로운 변신을 꿈꿨다.
“처음엔 조금 서운하긴 하더라구. 과년한 딸이 시집갈 나이에 먼 타국에 가는데 붙잡지는 못할 망정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더라니까.”
하지만 공항 입국장을 들어가며 힐끗 돌아본 금선은, 치마 자락을 움켜쥐고 우는 어머니를 보고야 말았다. 딸 앞에서는 눈물을 감춘 것이다.
사실 그녀가 독일에 온 이유는 동생 때문이었다. 남동생이 공부를 곧잘 했다. 하지만 선천성 소아마비를 가지고 있었다. 어릴 때 동네 아이들이 ‘병신’이라고 놀리면 바람막이가 되어주었다. 동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나중에 동생을 독일로 초청해 대학공부를 시켰다. 남동생은 보조기에 의지해 연세대 천문기상학과를 졸업 후 베를린 공대에서 석·박사를 취득한, 충북대 천문우주학과 김용기 교수다.
결혼할 때도 배우자 조건이 동생의 공부를 돕고 한국 가족을 돕는 것을 인정한 사람이어야 했다. 게다가 남동생이 ‘괜찮다’고 하면 더욱 ‘오케이’였다. 어쩌면 까다로울지 모르는 결혼조건인지, 서른 여덟 살이 되도록 짝을 만나지 못했다. 아이들을 좋아해 아기를 낳고 싶었던 금선은 점점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주선으로 한국에서 몇 번 선을 보곤 했지만, 외국물 먹은 여자에 대한 편견과 그녀 또한 남자를 한 번만 보고 인생을 결정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는 자신이 직접 독일에서 남자를 고르겠다고 선언했다.
베를린 노이쾰른 지역 신문에 ‘신랑감을 찾습니다’라고 광고를 냈다. 당시 동양여자에 대한 신선한 시각이 팽배해서인지 이력서가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최종 두 명이 남았고 그 때 만난 사람이 바로 지금의 남편 우베 뮌쇼 씨다. 남을 편안하게 해주고, 설득력이 있는 우베였지만, 그의 직업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땐 그 남자, 불알만 달았지 볼 게 없었어. 하하. 하지만 지금은 대 만족이야. 내가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우베 같은 남자를 어디서 만나겠어?”
다른 한인 간호사 친구들은 의사 남편도 있고, 교수도 있는데 당시 우베는 부동산 관련 소개해주는 일을 했다. 하지만 그때 독일에서 유학하며 같이 살던 남동생이 만나보고는 우베를 적극 추천했다. 결국 그녀는 우베와 결혼 계약서를 썼다. 남동생의 공부를 도울 것, 한국에 돈 보내는 것을 허락할 것, 금선이 무용하는 것을 인정할 것 등이다. 그렇게 결혼한 우베 씨는 이 약속을 지금까지도 평생 맹세로 간직한다.
금선은 독일에 오자마자 무용에 빠졌다. 83년에 베를린 간호협회 내 가야무용단 창립 초대 단장을 역임했고, 91년부터 95년까지 세종한글학교 무용지도와 97년부터 현재까지 베를린 한글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한국무용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 문화를 알려면 한글을 해야 하잖아. 그래서 전부 한국말로 가르쳤어. 설날에는 세배하는 법도 가르치고, 추석 때 송편도 만들고 아이들에게 우리 문화를 알려주는 게 얼마나 보람이 있는지 몰라.”
한글학교 때 무용을 배웠던 아이들이 자라 삼십이 넘어서 함께 북춤과 부채춤을 출 때면, 세월의 빠름을 실감하곤 한다. 2011년엔 회룡 한국무용제에서 일반부 장려상을 수상했고, 지난 2012년엔 그녀의 무용 30년을 총 망라한 ‘바람 꽃에 핀 꽃’ 무용 발표회를 열었다. 금선은 독일 한인사회 한국무용의 산 증인이자 한국 전통문화를 알리는 홀씨가 된 셈이다.
1976년, 비교적 마지막 파독 간호사로 독일에 왔지만 선배, 동료 한인 간호사들의 적극적인 호응으로 2013년엔 26대 베를린 간호협회 회장으로 추대되면서 한인 간호사들의 친목과 화합을 다지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금선은 우어반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면서도 간호협회 회장과 한글학교 무용 교사, 가야 무용단 등의 여러 일정들을 소화해내 똑순이, 억척녀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였다.
독일생활에서 가장 행복했을 때가 아이를 낳았을 때라고 이야기하는 금선은 아들 이야기를 하자 얼굴이 환해졌다가 금세 어두워졌다.
“벌써 이십 년도 훨씬 지난 일이네. 애를 셋 이상은 낳고 싶었는데 하나밖에 못 낳았어. 애가 한 살 반이 되었을 때 갑상선 암에 걸렸지 뭐야. 거기다 유방염증과 자궁에도 문제가 있었어. 항암치료 하는데 애를 더 가질 수가 있어야지. 근데 수술하고 3일이 지났는데 병원 창문 밖으로 햇빛이 비치는 거야. 그 햇빛이 얼마나 고마운지 용기가 났어. 난 이길 수 있어, 라고 생각했지.”
금선은 자신의 질병을 치료한 것은 춤이라고 말했다. 가끔 우울해지면 춤을 췄다. 금선에게 춤은 암 치료제나 마찬가지다.
“무엇이든 열정을 바치는 그 무언가가 있다면 몸 안의 독소나 질병도 사라지는 것 같어. 열정이 긍정을 키우고 그게 약이지 뭐겠어? 하하.”
금선 특유의 호탕한 웃음이 창문 밖 태양을 슬그머니 끌어들인다. 그녀에게 인생의 태양은 지금 긍정적인 이 순간, 오늘, 그리고 내일이다.
/박경란 재독 칼럼니스트 kyou7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