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갈래 찢긴 동포들 … 연해주는 슬프다
2015년 08월 13일(목) 00:00
① 평화와 통일의 관문 ‘우수리스크’

전남도교육청 독서토론열차학교 참가자들이 지난 1일 러시아 우수리스크의 이상설 선생 유허비에서 선열의 희생을 기리고 남북통일을 염원하고 있다. /러시아 우수리스크=박정욱기자 jwpark@kwangju.co.kr

러시아 극동 연해주는 서글프다. 이념 대립에 갇혀 항일독립운동의 성지를 외면하고, 네 갈래로 찢겨 서로의 길을 걷고있는 한민족 동포들의 오늘을 그대로 보여준다.

강제이주의 아픔을 간직한 ‘고려인’, 중국서 건너와 장사를 하는 ‘조선족’, 외화벌이를 위해 품을 파는 ‘조선인민’, 그리고 유라시아 드림을 꿈꾸는 ‘한국인’으로 갈려있다.





통일과 평화의 꿈을 품은 유라시아 대장정의 출발점이며, 휴전선에 가로막힌 대한민국을 대륙으로 잇게 하는 시작점이 바로 연해주다. 전남도교육청 시베리아 횡단 독서토론열차학교와 함께 격동기 한민족의 궤적을 되돌아본다.

◇어찌 조국에 돌아가리=“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한 내가 어찌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몸과 유품은 불태워 강물에 흘려보내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헤이그 특사’로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의 유언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20㎞ 떨어진 우수리스크시 외곽 수이푼강(江) 언덕. 이 선생의 유해가 뿌려진 곳으로, 무성한 수풀 한 켠에 자리잡은 이 선생의 유허비는 쓸쓸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아무 것도 없던 이곳에 2001년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유허비를 세웠다.

그의 유해를 삼킨 수이푼강은 붉었고, 소용돌이쳤다.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유명을 달리한 울분을 그대로 토해내는 듯했다. 아니, 갈라진 조국을 꾸짖는 호된 질책이었다.

이곳에서 이상설은 ‘헤이그 특사’가 아닌 연해주 항일독립운동의 대부였다. 의병군을 창설하고 권업회·성명회 등 항일운동단체를 주도했다.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는 등 국권회복운동에 헌신하다가 1917년 오랜 투병 끝에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전남도교육청 독서토론 열차학교 참가자 104명은 유허비 앞에서 선생의 조국애와 독립정신을 기리며 헌화했다. 열차학교 하상규 교장과 성용상 학생회장이 대표로 헌화하고 묵념을 올렸다. 참가자들은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애국가를 합창하고 손편지로 소망글을 띄웠다.

송미주 양은 “선생의 헌신으로 대한민국이 평화롭다”며 “10년, 20년내 남북통일을 이뤄 고향 전남에서 이 곳까지 열차를 타고 꼭 다시 방문하겠다”고 다짐했다.

◇최재형을 아는가=연해주엔 또 한 명의 독립운동 대부가 있다. 최재형이다. 고려인 최초로 지신허의 러시아학교에 입학해 문학을 공부한 함경도 노비의 아들이다. 러시아 선장의 양아들로 입양된 후 타고난 사업 수완을 발휘, 군납과 건설로 연해주 최고 거부가 됐다. 안중근이 우덕순·조도선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모의하고 사격연습을 했던 블라디보스토크의 대동공보사 사장이었다.

‘대한국인’ 안중근이 여순감옥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보호했던 사람이 최재형이었다. 그는 연해주 항일의병의 든든한 후원자였고, 남아있는 재산을 미련없이 조국의 독립에 쏟아부은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재무부장이었다.

하지만, 그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이념의 벽에 갇혀 독립운동의 발원지인 연해주 독립운동을 교과서 밖으로 밀어냈기 때문이다. 들어갈 수 없는 그의 생가엔 대한민국 정부의 팻말만 하나 덩그러니 붙어있다.

◇광복에서 통일의 전초로=이상설·최재형을 뒷받침한 이들은 우수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들이었다. 특히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은 독립운동 기지이자 민족의 성전이었다. 1910년 일본에 의해 국권이 침탈당하자 국내외 지사들은 신한촌으로 모여들었다. 국권회복을 위해 필사의 결의를 다지며 성명회·권업회 결성, 한민학교 설립, 신문 발간, 13도의군 창설 등 이곳에서 민족역량을 길렀다. 1919년에는 우리나라 최초 망명정부인 ‘대한국민의회’를 수립해 대일항쟁의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불행히도 1937년 스탈린에 의해 한인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됐고, 신한촌은 폐허가 됐다. 지금은 선조들의 발자취를 찾아볼 길이 없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게 ‘서울스카야2’(서울거리 2번지)다. 폐허에 가깝게 방치된 이곳마저 사라진다면 연해주에서 한인들의 자취는 공식적으로 사라지게 돼 마음이 무거워졌다.

/러시아 우수리스크=박정욱기자 jw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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