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청년 빛나는 미래] “전시의 모든 과정을 설계하는 사람들”
2025년 10월 21일(화) 10:45
(14) 광주시립미술관
전시 기획부터 해외 교류까지…예술 현장의 ‘숨은 조율자’
미술관을 만드는 일…작가와 또 다른 창작의 또 다른 형태
좋아하는 일이자 취미가 직업으로…“가끔은 짝사랑 같아”

학예연구사 서영지(오른쪽)씨와 이혁진씨가 광주시 북구 광주시립미술관 앞에서 대화하고 있다. /나명주 기자 mjna@kwangju.co.kr

“전시 기획부터 작가 면담, 해외 교류까지 모든 업무를 책임집니다.”

전시가 시작되기 전 수많은 과정을 꼼꼼하게 점검하고 최종 완수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학예연구사다.

광주일보가 만난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서영지(여·37)씨와 이혁진(36)씨는 ‘큐레이터’라는 이름 뒤에 숨어 있는 수많은 업무의 세계를 풀어놨다. 이들은 예술의 현장에서 전시를 만드는 전문가이자, 때로는 창작자와 협업하며 하나의 예술적 공간을 구축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6년 차 학예연구사인 이혁진씨는 국내 기관 협업 전시 기획은 물론 해외 기관과의 국제 교류 전시도 담당하고 있다. 이씨는 지난 5월부터 9월까지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문화도시 광주전’에서 현지 재단과 협업해 전시 방향을 수립하고 기획안을 짜며 작품을 현지로 보내는 전 과정을 수행했다.

서영지씨 역시 6년 차 학예연구사로 전시 기획과 아카이브 업무를 맡고 있다. 서씨는 “작가의 작업 방향과 공간을 조율하는 일, 설치나 미디어아트 등 복합적인 전시를 실현하는 일도 학예연구사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작품 하나가 전시장 한 실(室)을 차지하기도 하고 공간과 빛, 소리의 관계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작가와의 협업은 필수적이다.

학예연구사 서영지(왼쪽)씨와 이혁진씨가 광주시 북구 시립미술관 1층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나명주 기자 mjna@kwangju.co.kr
서씨는 “단순히 걸고 꾸미는 게 아니라 작가의 생각을 공간 안에서 구현해야 한다. 학예연구사는 작가와 함께 창작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학예연구사는 단순히 전시를 기획하는 사람을 넘어 미술관의 철학과 방향을 세우는 ‘조율자’이기도 하다.

서씨는 “공립 미술관은 전문성과 공공성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며 “전시가 예술적으로만 흘러갈 수는 없다. 시민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균형을 잡는 것도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도슨트나 갤러리스트와 혼동하는 경우도 있는데, 학예연구사는 하나의 전시가 시작되기 전부터 끝날 때까지 모든 과정을 설계하고 관리하는 전문가”라고 강조했다.

이씨 역시 “학예연구사는 ‘멋진 직업’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조사, 연구, 행정, 디자인까지 다 해야한다”면서 “예산 분배와 문서 작업, 전시 개요 작성부터 포스터·도록 디자인, 공간 배치까지 전부 담당한다. 논문을 읽고 작가 인터뷰를 하고, 아카이브를 스캔해 정리하는 일까지도 큐레이터의 몫”이라고 전했다.

이들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만큼 감정의 진동도 크다고 했다.

서씨는 “작가처럼 직접 작업을 하는 건 아니지만 작가의 작업을 내 방향대로 전시장 안에서 구현할 때 ‘나의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면서도 “애정을 쏟은 만큼 돌아오지 않을 때는 짝사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고 웃었다.

그는 또 “일 자체가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면서 “취미가 미술관 관람이었는데 이제는 전시 연출과 주제를 분석하는 시선으로만 보게 된다”고 말했다.

이씨도 “좋아하는 게 일이 되면 즐거움만 있을 것 같지만 현실은 다르다”며 “예상치 못한 상황이 많고 늘 대비해야 한다. 전시 오픈 후 관객들이 ‘예쁘다’고 말할 때야 비로소 힐링이 된다”고 했다.

이들은 학예연구사를 직업으로 선택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예술과 사람을 꼽았다.

서씨는 “작가와 소통하는 게 너무 즐겁고, 미술에 대한 애정도 커 예술적으로 접근했을 때 전시기획이 하나의 창작 행위로 느껴졌다”고 했고, 이씨는 “어릴 때부터 미술 서적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미술사와 작가, 그리고 전시에 관심이 생겼다”고 말했다.

서씨는 2022년도에 개관한 울산시립미술관 건립 추진단에서 근무한 독특한 이력도 가지고 있다.

그는 “개관 전 미술관의 방향성을 세우고 소장품 수집과 비전 수립까지 전반적인 업무를 담당했다. 미술관이 어떻게 세워지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경험이 지금의 큰 자산”이라며 뿌듯해했다.

모두 광주 출신인 이들은 ‘문화 도시’ 광주에서 문화와 관련된 업무를 하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씨는 “광주에는 비엔날레를 비롯해 국제 교류 기반이 잘 갖춰져 있다”며 “해외 기관에서도 광주를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향의 도시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이 크다”고 강조했다.

서씨도 “울산에서 해외 작가들과 작업을 할 때 고향이 광주라고 하면 백이면 백 광주를 모르는 이들이 없었다”며 “광주가 예향의 도시이고 문화 쪽으로 활성화된 도시라서 뿌듯하다”고 했다.

이들은 학예연구사를 꿈꾸는 이들에게 연구직이다 보니 석사 이상의 학력을 갖출 것과 열린 태도 등을 강조했다.

이씨는 “시험 공고를 보면 박물관학, 미술학 등 관련 석사 이상이 기본 조건”이라며 “연구 직렬이라 학문적 깊이와 실무 경험을 함께 쌓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 업무의 핵심 역량으로 ‘회복 탄력성’과 ‘조율 능력’을 꼽기도 했다.

이씨는 “전시는 항상 마감이 있고 한가할 때가 거의 없다”며 “스트레스를 회복하고 자기를 쉬게 하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씨는 “전시는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고 ‘협업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다양한 의견을 받아들이고 조율할 수 있는 열린 태도를 가져야 한다”며 “작가와 협업하고 대중과 소통하는 능력은 필수”라고 설명했다.

미술계 진입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꾸준한 공부와 전시 경험 등도 강조했다.

이씨는 “전시를 많이 보면서 감각을 넓혀야 한다”며 “논문이나 미술 전문지를 꾸준히 읽다 보면 보는 눈이 달라진다. 1년에 한 편, 한 권을 읽는다는 목표로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서씨는 “예술과 사람에 대한 애정이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라며 “학예연구사는 긴 호흡이 필요하기 때문에 꾸준히 배우려는 자세와 현장에서 경험을 쌓으려는 적극성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김해나 기자 khn@kwangju.co.kr

실시간 핫뉴스

많이 본 뉴스

오피니언더보기

기사 목록

광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