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 건축기행] 처마 너머 무한대 자연…영남의 서원은 낙동강으로 흐른다
2025년 08월 04일(월) 20:45
[영남 병산서원·하회마을·부용대]
병산서원, 2019년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등재
정면 7칸·측면 2칸 누마루, 사방이 산들로 병풍
널마루 바닥·자연석 주춧돌 등 전통건축 교과서
하회마을, 화산 업고 낙동강 안은 ‘배산임수형’
부용대, 높이 80m 절벽 위에서 하회마을 조감
류승룡 형제 수학한 원락재·겸암정사 자연과 조화

병산서원 누마루에서 무한대로 바라보는 자연의 풍경, 차경의 완성은 품위 있는 건축 공간을 통해서이다.

영남의 서원은 낙동강으로 흐른다. 퇴계선생이 심신의 안식처로 찾았던 청량산에서, 도산서원 앞으로, 병산서원 하회마을 부용대를 굽이돌아, 남으로 흘러 도동서원을 지난다. 남명의 덕천서원 산천재 냇물은 남강으로 삼랑진에서 낙동강을 만난다.

영남의 성리학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낙중(落中), 강동(江東), 강서(江西)학파로 일컫기도 한다. 퇴계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류성룡, 김성일, 정구 등 유학자들의 문맥으로 영남학파가 성립했다. 한강 정구는 김굉필을 제향하는 ‘도동서원’을 건립하고, 서애 류성룡을 제향하는 ‘병산서원’, 징비록의 산실‘옥연정사’가 그 흔적이며, 학봉 김성일을 바로 알리는 ‘학봉역사문화공원’이 지난해 조성되었다.

병산서원의 주변은 산들로 막아선 병풍(屛風)처럼 닫힌 풍경들이다. 전통 건축 교과서로 불리는 병산서원은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됐다.
◇병산서원, 강학공간의 계승

애초의 병산서원은 하회마을 서당(고려시대 풍악서당)에서 출발했다. 선조5년(1572년)에 류성룡이 이곳으로 옮겨와 병산서당으로 개칭(1614년)하여 제자들을 양성, 철종14년(1863년) 사액(賜額)서원으로 승격했으며 대원군의 서원 철폐에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로 오늘에 이르렀다. 2019년 7월, 병산서원을 포함한 9개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한국의 서원‘에 등재되었다. 병산서원은 2010년 ’한국의 역사마을‘ (2010년)과 함께 유네스코 2관에 올랐다. 발표 당일에는 건축 답사일정으로 하회마을에서 머물렀고, 다음날 병산서원 만대루에서 새아침(?)의 햇살을 맞았다.

과거의 서원에서 특이하게도 현대의 교육기관으로 계승되어 인근의 풍산고등학교가 병산서원의 후신인 셈이다. 이 학교는 미국 41대, 43대 조지 부시 두 대통령이 방문하여 특강을 한 바 있다.

지역대학 건축과에서는 여름방학마다 이곳에서 ‘병산건축아카데미’를 열었다. 만대루에서 건축가 특강과 담론으로 밤을 세웠고 학생들은 강변 텐트 아래에서 설계 작업과 숙식을 했다. 그 전통을 이어 ‘대구경북건축아카데미’가 31회로 국내 최장을 기록하고 있으니 병산서원은 고금을 아우르는 강학공간인 것이다.

뒷간의 해학이 병산서원 전면 마당에 있다. 달팽이 곡선 담으로 문이 없어도 보이지 않는 전통 건축의 절묘한 공간구성이 인상적이다.






◇만대루, 전통건축 공간의 품격

한국의 서원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으로 병산서원 만대루(晩對樓)를 꼽을 것이다. 만대루에 각인된 방문객을 맞는 입구 대문 복례문(復禮門)은 사대부 양반집 솟을대문이다. 만대루 아래 한 켠 천원지방(天圓地方) 광영지(光影池)에서 마음을 비춰봐야 한다.

국보도 보물도 없는 병산서원의 으뜸은 만대루 건축의 공간과 경관이다. 주변은 산들로 막아선 병풍屛風처럼 닫힌 풍경들이다, 그래서 ‘병산서원(屛山書院)’이다. 정면7칸 측면2칸 누마루 공간에서 사방 무한대로 바라보는 자연의 풍경, 한국 전통조경 방법론에서 차경(借景)이라 말한다. ‘산을 빌리고 물을 빌리고 구름을 빌리고 하늘을 빌린다’는 차경의 완성은 품위있는 건축 공간을 통해서이다.

입교당 마루에 앉으면 기둥과 처마의 실루엣 너머로 안마당- 동 서재- 만대루- 낙동강- 산의 풍경으로 확장된다. 안마당에서도 만대루에서도 시선에 따라 경관은 변화한다. 널마루 바닥, 통나무 계단, 자연석 주춧돌의 그랭이 질, 휘어진 기둥과 대들보 전통건축의 디테일들은 숨을 쉬고 있다.

엄격한 서원건축에서도 성리학에서 벗어나려는 듯, 보이지 않는 변수와 해학이 숨어있기도 하다.

함께 나란해야 할 동재(動直齋)와 서재(靜虛齋), 그런데 동재의 축 방향은 사당을 향하여 살짝 어긋나 있다. 유생들의 교실이자 기숙사는 대칭이며 똑같이 2개의 방과 1칸 마루 평면이지만 서재 윗방은 장서실이 있는 독특한 평면이다. 동재는 상급생, 서재는 하급생으로 높은 기단 위 입교당의 관찰 감시를 받는 강학공간이다.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입교당(入敎堂)은 서원의 중심이자 상징건축이다. 서원 당호는 곧 학문의 방침 교훈과도 같다. 입교당 현판은 한석봉 글씨이며 병산서원 현판은 조선 철종의 어필이다. 대청마루는 원장과 유생들의 강론장이며 좌우 방은 교무실 관사 기능이다. 서쪽(敬意齋)은 교수와 유사, 동쪽(명성재)은 원장으로 평면구조가 다르다.

성리학의 건물, 방, 계단, 제사에서도 동쪽과 오른쪽은 상위, 서쪽과 왼쪽은 하위 개념이 현대건축에서도 그 잠재성이 내재한다. 오른쪽 계단은 선생과 상급생, 왼쪽 계단은 하급생의 서열이다. 입교당에 오르는 좌 우 계단 배치인데 사당에 오르는 계단은 하나로 통합됨이 전통서원과 다르다. 사당에 서애 류성룡과 둘째아들 수암 류진 부자(父子)를 나란히 제향하는 사례도 유일하며, 신문(神門) 기둥석에 서애의 사상을 나타내는 팔괘가 새겨져 있음도 특이하다.

서원에서는 학문보다도 배향 제향을 더 중시한다. 전형적인 중심축(루-재 마당-강당-사당)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사당 배치는 위계와 함께 화재를 피하기 위한 영역구분으로 거리를 두었다. 병산서원의 사당(신문-존덕사)은 중심축에서 벗어나 그 위치 나란히 장판각(서고)이 배치되어 학문 중시를 보여준다. 사당의 위치는 전사청(典祀廳) 고직사(庫直舍)의 부속영역 동선을 가까이로 배치하였다.

뒷간의 해학이 병산서원의 전면에 있다. 서원의 오른편 고직사의 정면 앞마당에 있으니 뒷간이 아니라 앞간으로 달팽이 곡선 낮은 담으로 문이 없어도 보이지 않는 추상적 평면이다. 로버트 스미슨의 대지미술을 연상시키는 작은 뒷간이다. 서양의 ‘WC’를 우리는 뒷간 통시 해우소 이름이 다양하다. 군위 사유원 산속 뒷간(WC) 문에는 ‘多不有時’라는 서예 명필이 붙어있다. 절묘한 동서 융합이다.

물이 돌아 흐르는 하회(河回)마을, 부용대 옥연정사는 서애 류승룡이 징비록을 저술한 공간이다.
◇하회(河回), 물이 돌아 흐르는 마을

‘물이 돌아 흐른다’는 하회(河回)마을을 포곡형(包谷形) 배산임수형(背山臨水形)이라 한다. 병산서원의 북쪽, 하회마을 동쪽 배산은 화산으로 낙동강은 화산을 돌아서 흐른다. 600여 년 세월의 풍산 류씨 입향 마을은 임진왜란 전란에서도 잘 보전되어 전성기에는 300호, 지금은 150여 호의 마을이다. 2개 보물을 포함하여 10여개의 지정건축이 있는 전통건축박물관이며, 마을 중앙으로 류 씨 가문이 변두리에는 각성 가옥들이 배치하고 있다.

징비록의 서애 류성룡에 가려진 형님 겸암 류운룡이 하회마을의 텃주대감이다. 양진당(養眞堂)은 하회 류씨 대종택이자 겸암고택이다. 사랑채는 고려시대, 안채는 조선시대 주거로 시대가 공존하는 고택이다. 고택에는 탁월한 공신 대학자에게 영구히 제사를 나라에서 허락한 2개의 불천위(不遷位)사당이 있다. 충효당(忠孝堂)은 서애 류성룡의 관직 타지생활 사후에 문하생들과 후손이 지은 서애고택이다. 마당 한편에 서애의 저서 유품을 전시하는 영모각(박물관)이 있고 바깥마당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방문기념 식수가 있다.

◇부용대, 서애 겸암 학문의 공간

물 위에 떠 있는 연꽃 같은 하회마을을 내려다본다는 부용대(芙蓉臺), 나룻배를 건너 높이 80m의 절벽위에서는 마치 드론처럼 높은 시각에서 마을을 조감하게 된다.

경관이 좋은 이곳에는 서애 겸암 형제가 우의를 나누면서 학문에 정진한 건축과 서원이 있다. 마당 넓은 옥연정사 이곳 원락재(遠樂齋)는 서애 류승룡이 7년 동안 징비록을 저술한 공간이다. 겸암 류운룡이 학문연구와 후진을 양성하며 심신을 수양한 겸암정사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누정(樓亭) 건축이자 원림(園林) 공간이다. ‘겸암정(謙菴亭)’ 현판은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는 스스로 자기 몸을 낮춘다’는 주역의 뜻이 담긴 스승 퇴계의 글이다. 겸암을 배향하는 화천서원(花川書院)은 서원 철폐령에 철거되었다가 1996년 복원하였다. 아우 서애는 형님 겸암을 뵈려 조석으로 옥연정사와 겸암정사 가파른 경사 길을 오갔으며 겸암사(謙巖舍)는 먼저 떠나신 형을 사모하는 시이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서원들과는 달리, 병산서원-하회마을-부용대 서원과 마을을 연결하고 감싸 안는 것은 낙동강의 물길이요 영남 성리학의 흐름이었다.

<최상대 전 대구경북건축가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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