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여름나기- 이중섭 소설가
2025년 08월 04일(월) 00:00
요즘 여름 불볕더위로 힘들다. 이제 칠팔월이면 당연하다는 듯 열대야가 빈번하다. 앞으로 여름은 더 더울 거로 예상한다. 문명의 혜택으로 풍족하지만 왠지 옛날 같지 않다는 느낌이 자주 든다. 갈수록 여름이 무섭다. 자꾸 어린 시절에 천둥벌거숭이로 뛰놀던 고향 물가가 그립다. 늘 고향 쪽 하늘을 보며 갈맷빛 산과 들을 마음속에 그려본다. 추억 속에서 나는 언제나 소년이 된다.

고향 벌판을 흐르는 송내는 천등산에서 발원되었다. 여러 마을과 들판을 흘러내리다가 고흥만에서 바다와 만났다. 냇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기수지역에 회귀성 물고기들이 많이 살았다. 싱싱한 살집을 가졌던 어린 숭어 새끼인 모치, 여름이 가까워지면 바다에서 송내로 은어 떼가 올라왔다. 아이들은 은어를 잡으려 고춧대를 뜯어서 냇가 사방에다 흩뿌려놓고 자근자근 밟아댔다. 아이들은 팔딱이는 은어를 바구니에 주워 담으며 여름날을 보냈다.

은어. 산삼이 있는 산 아래 청정한 개울에서만 산다는 신성한 물고기. 송내를 따라 한참을 오르면 우뚝하게 서 있는 천등산. 아이들은 거기 산삼이 있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매일 멀리 솟은 갈맷빛 산 위 파란 하늘을 보며 소년은 무언지 모를 둥그런 그리움을 키우며 살았다.

은어가 냇가로 쏟아져 들어오고 어느 때는 전어가 파닥거리며 물살을 헤집고 다녔다. 물고기도 많았고 먹을 만한 풀 들도 지천으로 깔렸는데, 그 시절 송내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뙤약볕 길은 멀고 소년은 늘 배가 고팠다. 몇 번을 쉬었다가 다시 걷기를 반복했다.

유월 햇볕이 뜨거워지면서 산과 들에는 녹음으로 가득했다. 송내에서 헤엄치던 아이들은 점점 얕은 물가에 싫증이 났다. 더 깊고 위험한 물놀이터를 찾았다. 그중의 하나가 논 가에 있는 둠벙이다. 갈수기에 이 둠벙에 저장해 놓았던 물을 벼 논에 댔다. 시골 아이들은 둠벙에서 헤엄을 자주 했다. 또래들보다 성숙했던 소년은 한두 해 형들보다 수영을 잘했다. 키를 훨씬 넘는 깊은 둠벙에서도 마치 얕은 곳처럼 똑바로 선 채 두 손을 얼굴 앞에 세우고 발헤엄을 쳤다. 무서워하는 아이들을 물속으로 끌어들였다. 겁많은 아이들이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면 끌어올려 주곤 했다.

소년이 3학년 방학 때였다. 날씨가 엄청 더웠다. 수영을 잘하는 몇몇 형들의 지원 아래 저수지를 건너는 도전에 나섰다. 우리는 산 밑에 자리 잡은 저수지에 도달했다. 저수지 둑은 길고 풀빛으로 가득했다. 아이들은 건너편 저수지 끝을 바라보았다. 저수지 물은 어서 오라는 듯 반짝거렸다. 아이들은 아자, 아자! 하며 소리를 지르며 소년의 도전 의지를 부추겼다. 소년은 저수지의 깊은 물 속은 가능한 한 상상하지 않으려 했다. 6학년 형들도 한두 명 제외하곤 아직 저수지를 건너지 못했다. 멀리 천등산은 겁대가리 상실한 꼬맹이를 내려다보며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처음에는 평영인 개구리헤엄을 치며 물살을 갈랐다. 한참을 헤엄쳐 가다 중간쯤에 다다랐을 때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건너편은 아직 한참이나 멀리 있었다. 갑자기 몸에서 힘이 죽 빠지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살갗에 닿는 물의 감촉도 차가워졌다. 아, 앞으로도 뒤로도 돌아갈 수 없이 까마득한데 다리마저 뻣뻣해졌다.

소년은 얼른 몸을 뒤집었다. 배영인 송장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시골 아이들은 송장벌레(소금쟁이)가 뒤집어서 헤엄치기에 그렇게 불렀다. 눈앞에 시퍼런 물이 보이지 않자 일단 무서움이 덜했다. 대신 뜨거운 햇살이 얼굴에 내리쬐었다. 등짝 아래는 시커먼 무언가 나타나 아래로 곧 잡아당길 것 같고 끝은 언제 닿을지도 모르는 서늘한 저수지 한가운데 누워서 바라보는 하늘은 너무나 어처구니없이 푸르렀고, 하얀 뭉게구름은 너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저수지를 건너자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 후로 한동안 소년은 아이들의 부러움을 샀지만 또 금방 잊혔다. 여름 동안 아이들은 밭에 심어진 옥수수처럼 무럭무럭 자랐다.

어른이 되어서도 가끔 저수지를 건너는 꿈을 꾸곤 한다. 어김없이 물속에서 쑥, 올라온 검은 손에 목덜미를 잡힌다. 식겁하고 꿈에서 깨지만 이제 더 이상 키는 자라지 않는다. 하지만 나이 들어서도 유년 시절을 생각하면 언제나 여름 송냇가의 은어 떼와 저수지에서 반짝반짝 빛나던 윤슬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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