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 김형중 조선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인문도시광주위원회 위원장
2025년 07월 28일(월) 00:00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란 말이 있다. 마르크스의 용어인데 그리 어려운 말은 아니다. 한국 현대사가 이미 아주 강렬하게 경험한 바 있고 또 현재에도 경험 중인 현상을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흔히 ‘이농향도’라고 명명되는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민생회복지원금을 30만 원 더 받는 ‘지방들’과 그러지 않아도 되는 ‘수도권’만 존재하는, 말하자면 지역 경계가 계급 경계가 되어버린 이 나라의 기이한 상태 초입에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 있었다.

‘농민’은 대지와의 연을 끊지 않은, 혹은 끊지 못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런데 초창기 자본은 어떠한 생산수단과도 분리된, 이를테면 대지나 자연과 분리된 순수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땅뙈기를 가진 농민이 아니라,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기에 팔 수 있는 것은 하루 몇 시간의 노동이 전부인 사람들, 노동자들이다. 인위적인 방식으로 토지의 국유화와 기업화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기계적 대량 생산이 이루어지면, 대를 이어 소규모 소작을 지어오던 농민들은 살길을 찾아 도시로 떠날 수밖에 없다.

자본과 국가는 그런 식으로 대지와 인간의 오래된 인연에 종지부를 찍고, 농민은 화폐로 환산이 가능한 ‘순수 노동력’이 된다. 근대화 초창기에 대부분의 나라에서 일어났던 일이고, 한국에서는 박정희에 의해 유독 폭력적으로 일어났던 일이다.

이런 일이 농민들에게만 일어났던 것은 아닌 듯하다.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우리는 이즈음 ‘이야기의 본원적 축적’ 과정이 완성되고 있는 현상들을 목도한다. ‘이야기’에도 ‘대지와 터전’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는 그리스 문명이라는 대지가 배양하고 낳은 곡물과 같다. 그 터전으로부터 분리될 때, 서사시는 잘못 이식된 곡물처럼 고사하거나 한갓 시장에서 교환 가능한 이야기, 곧 ‘스토리 텔링’과 ‘문화 콘텐츠’가 된다. 이야기의 본원적 축적이란 말은 이런 의미로 썼다. 이제 문화산업은 모든 문명권의 이야기들을 단위로 쪼개 파는 것이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었다.

나는 지금 영화 ‘어벤저스 : 인피티니 워’포스터를 다른 화면에 띄워 두고 이 글을 쓴다. 상단에 거대한 몸집의 ‘타노스’가 우뚝 서 있다. 원래 그는 그리스 신화 속 저승사자 ‘타나토스’였다. 그가 어쩌다 21세기에 영화 속으로 불려 나와 손가락 장난 한 번으로 우주의 생명체 절반을 절멸시키는 악행을 저지르게 되었을까? ‘아이언 맨’은 미국에 적을 둔 다국적 군수사업체 총수고 그 옆의 ‘토르’는 북유럽 신화 속 천둥의 신이다. 검은 옷 입고 신출귀몰하는 러시아 출신 여성 스파이는 냉전 시대의 산물이고, ‘블랙 펜서’라고 불리는 와칸다 공화국의 왕자는 마치 인종차별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끼워넣기라도 한 것처럼 검은 피부를 가졌다. 물론 이 모든 영웅들의 대장은 ‘캡틴 아메리카’, 바로 미국의 전쟁 영웅이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할까? 저 영웅들이 자신들이 속해 있던 이야기의 대지로부터 분리되어, 교환 가능한 이야기 단위들, 곧 상품이 됨으로써 가능하다. 그리고 그들이 모여 만드는 이야기들의 우주를 우리는 이제 ‘마블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로서는 ‘세계관’이란 단어가 패러디처럼 우습게만 들리는데, 왜냐하면 정확히 저들이 만드는 이야기는 ‘세계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세계관이란 말을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해 우리 각자가 가진 관점’ 정도로 이해한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저들이 만드는 세계관은 이미 이 지상을 떠나 버렸다는 의미에서 세계관도 뭣도 아니다.

아마도 이즈음 마블의 인기가 뜸해진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닥터 스트레인지’와 ‘캡틴 마블’의 등장은 어벤저스에게는 악재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 곧 ‘인간의 조건’을 벗어나 있는 수준의 영웅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우리는 중력에 끙끙대며 모두 지구에서 살다 죽게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병들기도 한다. 그들은 그런 우리들의 삶에 대해 들려주는 바가 전혀 없다. 아마 ‘아이언 맨’도 ‘캡틴 아메리카’도 그들의 ‘세계관’ 속에서는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로다주도 크리스 에반스도 반드시 죽는다.

죽음은 인간의 조건이고, 중력도 태양도 인간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일론 머스크에게 속지 말아야 하는 것도 그런 이유인데, 지구라는 ‘인간의 조건’을 벗어나는 일은 ‘우주여행 산업’의 판타지가 아니고서야 실현될 수 없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조건’에서 한나 아렌트가 인류의 가장 강력한 적으로 꼽은 것은 ‘핵폭탄’과 ‘우주선’이었다. ‘인간의 조건’으로서의 지구를 사라지게 하거나 혹은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다고 약속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렌트가 살아 있었다면, 그 둘 외에 틀림없이 이즈음의 문화산업도 함께 목록에 올렸으리라. 사족을 단다. 오래 전부터 광주가 ‘문화 중심 도시’와 ‘문화산업 중심 도시’를 그다지 구분하지 않은 것 같아.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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