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로 빚은 기억, 오월을 담다
2025년 05월 26일(월) 20:15
미로센터, 5·18 45주년 기획전…엄정애 작가·시민 8명 ‘종이인형’ 작품
‘소년이 온다’ 문재학 열사·잃어버린 신발 등 모티브…추모·기억 되새겨

동구 미로센터에서 오는 30일까지 5·18민주화운동 45주년 기획전 ‘오월, 종이로 빚은 시간’이 열린다. 엄정애 작 ‘어머니(왼쪽)와 소년’

아스팔트 위 신발들이 어지럽게 널렸다. 한 짝만 남겨진 구두, 구겨 신은 운동화, 흙먼지를 뒤집어쓴 고무신과 슬리퍼…. 신발주인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총으로 무장한 계엄군만이 검은 벽처럼 도열해 있다.

1980년 5월, 신발조차 신지 못한 채 떠나야 했던 영혼들. 그들에게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을 다시 신겨주고 싶은 마음이 종이로 빚어졌다.

동구 미로센터에서 오는 30일까지 열리는 5·18민주화운동 45주년 기획전 ‘오월, 종이로 빚은 시간’. 이번 전시는 지난달 미로센터 워크숍에 참여한 시민 작가들과 ‘인형 엄마’로 알려진 엄정애 작가의 작품들을 모았다. 이들은 창작을 통해 오월 영령을 추모하고, 살아남은 이로서의 책임과 기억을 되새기는 데 초점을 뒀다.

1954년생부터 1999년생까지 다양한 세대로 구성된 시민 작가 8명은 종이를 붙이고 발라 신발 형태의 조형물과 오월영령을 품에 안은 조상(祖上)의 인형을 완성했다. 운동화, 고무신, 꽃신 등 한 짝씩 놓인 신발에는 잃어버린 신발을 다시 신고 영혼이 편히 떠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겼으며, 종이인형에는 떠난 이들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 깃들어 있다.

시민작가 8인이 제작한 신발들.
1980년 당시 자신이 신고 다녔던 연두색 신발을 만들었다는 시민 작가 김희정씨는 “5·18 이후 침묵 속에 살아야 했던 광주시민들의 잃어버린 시간들을 작품에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서 “오월 영령을 종이인형으로 만들고자 했지만, 당시 시신들을 수습했던 상무관의 풍경이 떠올라 손이 도저히 움직이지 않았다”며 “대신 어머니와 나의 모습을 인형으로 만들었는데, 완성하고 나니 그 시절 광주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것 같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시민 작가 이다정 씨는 5·18 연극 ‘금희의 오월’에 등장하는 빨간 꽃신과 어린 시민군을 종이인형으로 표현했다. 그는 “5·18 당시 시민군에는 어린 청년들이 많았다고 들었다. 작품을 만들며 어디선가 그들이 쫓기고, 맞아 축 늘어져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며 “작업 과정에서 5·18을 직접 겪은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가 이 자리에 함께 모인 이유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 마음을 담아 종이 한 장 한 장을 정성껏 붙여 작품을 완성했다”고 말했다.

전시에서 엄정애 작가의 작품도 함께 만나볼 수 있다. 엄 작가는 고(故) 문재학 열사와 어머니 김길자 여사의 모습을 거대한 종이인형으로 형상화했다.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모티브가 된 문재학 열사는 단정한 교복 차림에 작은 들꽃을 손에 쥔 모습으로 표현됐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옛 전남도청을 끝까지 지키다 산화한 그의 표정에는 단단한 결의가 배어 있다. 그 맞은편에는 아들을 바라보는 김길자 여사의 종이인형이 있다.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언제든 품에 안을 듯한 자세로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보는 이에게 먹먹함을 준다.

엄 작가는 “오월이 되면 유난히 가슴이 시리다. 어디선가 총소리가 들려오는 듯하고, 골목 가게로 숨어드는 학생들의 위축된 모습, 금남로에서 싸우던 시민군의 모습이 떠오른다”며 “작업을 통해 가엾은 영혼들을 보살펴달라고 기도하고,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약속을 전하고자 했다”고 했다.

전시장 한쪽에는 작가들이 오월을 기록한 글들도 함께 전시돼 있다. ‘글 아카이브’ 워크숍을 이끈 임아영 문화기획자는 “5·18을 직접 겪은 세대가 기억을 꺼내놓으면, 교과서로 그날을 배운 젊은 세대는 조용히 귀 기울였다”고 작업 과정의 분위기를 전했다.

특히 재료로 쓰인 종이는 지난해 12·3 비상계엄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담긴 신문(2025년 3월)이었다. 그는 “‘5·18 종이인형’에 2025년 봄이 덧입혀진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같다”며 “작업의 모든 순간은 오늘의 산 자를 도운 죽은 자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하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장혜원 기자 hey1@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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