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봄 밤의 대화 - 이중섭 소설가
2025년 05월 12일(월) 00:00
늦은 밤 가게를 마치고 혼자 거실에서 술을 한잔하려는데 아내가 산책을 하고 돌아왔다.

“와! 꽃이란 꽃은 죄다 피었어요!”

평상시와 다르게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멀거니 쳐다보며 이제 보았구나, 생각했다. 날마다 꽃의 흐름을 보는 나지만 낮 동안에 가게에 있는 아내는 그렇지 못했을 터였다. 거실로 들어선 아내가 막걸리를 힐끔 보았다. 수술을 며칠 남기고 무슨 술이냐고 할까 봐 대꾸할 준비를 했다.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 온 딸기를 주섬주섬 꺼내 씻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에서는 파면된 전 대통령이 관저를 떠나 사저에 도착하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지지자에게 다가가며 학과 잠바를 입은 대학생들과 포옹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턱을 든 채 끄덕이며 손을 흔들었다. 얼마 전에 구치소에서 나오면서 지지자들에게 웃던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봐도 이해를 못 하겠어. 제정신이면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할 수 있지?”

아내는 중얼거리는 나를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마주한 자리라 조금 반갑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한 표정이었다. 방송에는 끊임없이 파면된 전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을 내보내고 있었다. 아내가 씻은 딸기를 김치냉장고에 넣었다.

“하긴, 어렸을 때부터 공부만 하고 그것 외에 다른 것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수많은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겠어. 예전에 고시촌에서 사법시험 공부했던 사람들이 다 그런 애들이잖아.”

아내가 김치냉장고를 닫으며 여기다 놓으니 잘 찾아 먹으라 했다. 자폐인 딸이 자기 입맛에 맞는 것은 보이는 족족 다 먹어대니 숨겨놓는 것이었다. 숨겨봤자 소용없는 일이지만 매번 딸과 아내는 숨바꼭질을 했다.

“그나저나 당신 다알리아꽃 좋아해?”

나는 깜박 잊을 뻔한 아내의 생일을 떠올렸다.

“아니 싫어. 생일 선물 하지 마. 뭐 특별한 날도 아니니 앞으로 선물하지 않아도 돼.”

조금 생뚱맞았다. 며칠 남지 않은 내 수술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래? 이번 단편소설 ‘모라추’ 원고료 당신 생일에 주려고 했는데.”

아내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무슨 말인지 한참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얼마나 되냐고 물어서 귓속말로 살짝 알려줬다.

“그렇게나 많아?”

이 정도 금액을 많다고 하니 조금 안쓰러웠다.

“그러면 줘. 꽃도 받을게.”

“이미 늦었어. 안 받는다는 사람한테 뭐 일부러 줄 필요가 있겠어.”

“아냐, 아냐! 받을게. 받아. 그것보다 내가 옆에 앉은 이유는 다른 데에 있는데.”

“다음 주에 수술하잖아. 너무 부담 갖지 말라고.”

나는 가만히 아내를 보았다. 진짜 수술 때문에 걱정이 많은지 얼굴이 수척했다.

“괜찮아.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자꾸 주위에서 그러니 되려 내 마음이 안 좋아지려 하네.”

요즘 갑자기 글을 쓸 일이 많아지고 덩달아 글도 탄력을 받나 싶었는데 먹장구름처럼 수술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소식을 알게 된 주위 글을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다양했다. 그동안 술 마시느라 글에 소홀했으니 이제 글만 쓰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라는 사람, 수술을 하고 나면 글이 깊어진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주위에서는 걱정하는데 정작 나만 무덤덤했다.

며칠 전에 수술을 마치고 집에 들어왔다. 입원한 지 보름만이었다. 수술 후 이삼일 극심하게 아팠지만, 그럭저럭 버텨냈다. 수술 경과도 좋았다. 집에 누워 있는 동안에도 아내는 여전히 혼자 가게를 보다가 밤늦게 집에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힘내라는 듯 나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와, 봄밤에, 봄밤에 꽃향기가 천지에 흩날리네!”

해마다 5·18 이즈음에는 하얀 이팝나무꽃과 붉은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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