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 입향조 충강공 송간(宋侃) - 송민석 수필가·전 대학 입학사정관
2024년 11월 20일(수) 00:00
충강공(忠剛公) 송간(松侃·1405∼1480) 선생은 고흥 재동서원(齋洞書院)에 배향된 중심인물로 여산 송씨의 중시조이며 고흥 입향조다. 조선 초기 충신으로서 세종, 문종, 단종 등 3대에 걸쳐 관직은 형조참판, 종 2품인 가선대부와 동지중추부사를 지내고 고흥 재동서원에 ‘단조초혼칠현신(端廟招魂七賢臣)’으로 모시는 할아버지다.

단종 왕비였던 정순왕후(定順王后)는 판돈령부사 송현수의 딸로 여산 송씨 가문이었다. 송간은 단종의 명으로 ‘팔도진무사(八道鎭撫使)’(민심을 수습하는 일종의 암행어사)로 호남 지역을 순회하던 중 계유정난(1453년)을 맞았다.

12세에 즉위한 단종의 재위 3년 2개월 만에 수양대군이 고명대신 김종서, 황보인 등 반대파를 제거하고 왕위를 장악한 정변이 계유정난이다. 세조의 찬탈 소식에 송간은 즉시 관직을 버리고 몸이 아프다는 구실로 고향인 전라북도 여산(礪山)에 내려와 울적한 나날을 보내며 두문불출하였다. 그 후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자 영월로 달려가 단종을 만나 통곡과 함께 진무 결과를 보고하고 여산으로 돌아왔다.

그 후 단종은 1457년 10월에 17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고 승하하였다. 송간은 장례를 치른 영월 호장(戶長) 엄흥도의 도움으로 단종이 평소 입던 곤룡포를 몰래 숨겨 충청남도 계룡산 동학사에 들어가 매월당 김시습 등과 함께 1458년 3월 15일에 위령제를 모시는 등 3년 상을 마쳤다. 그 후 호남 지역 순회 시에 보아 두었던 고흥군 동강면 마륜촌에 내려와 터를 잡고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아들 5형제 (맹유, 중유, 계유, 백유, 숙유)도 함께 고흥으로 내려왔다.

고흥 마륜촌 뒷산 대나무 푸른 숲 사이에 서산정(西山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아침 저녁으로 북쪽을 향하여 절을 올리고, 때로는 통곡하는 등 평생을 단종 임금에 대한 충절을 다하였다.

영문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실성한 노인으로 착각하기도 하였다 한다. 이분이 바로 560여 년 전 고흥에 처음 터를 잡으신 여산 송씨 19대조 충강공 할아버지다.

송간이 은거했던 서산정은 재동서원이 내려가 보이는 동강면 마륜리 마서마을에 위치해 있다. 송간의 호 서재(西齎)는 바로 마륜리 서쪽 언덕의 집을 가리킨다. 서산정 언덕에서 바라보면 고흥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순조 때 계룡산 동학사를 해체 복원할 때 대들보에서 기록물이 발견되면서 동학사 초혼제가 세상에 알려졌다. 세조의 권세에 짓눌려 암울했던 시절 초혼제에 참여했던 신하들 명단을 기록하여 대들보 속에 감추어 둔 것이다. 살벌한 시국에 초혼제에 참석한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당시 초혼제에 참석했던 ‘김시습, 조상치, 송간, 조영, 정지산, 이성희, 이축’ 7분을 ‘단묘초혼칠현신(端廟招魂七賢臣)’이라 일컫고, 여기에 엄홍도를 더해 ‘팔절’이라 숭상하고 있다. 동학사에는 이와 관련 ‘초혼각’, ‘숙모전’이 있고, 고흥 재동서원에는 ‘단묘초혼칠현사적비(端廟招魂七賢事蹟碑)’가 건립되어 있다.

조선조 22대 임금인 정조는 송간에게 사육신, 생육신과 다름없는 충신이라 하여 ‘충강공(忠剛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정조 16년, 1791년)

고흥에 거주하는 충강공 후손들 가운데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들이 많다. 선무원종 1등 공신으로 채록된 송대립, 송희립 형제를 비롯하여 수십 명의 공신들이 배출되었다.

충강공의 산소는 낙안(벌교읍 원동)의 백이산 영보제(永報齊)에 모셔져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후손들이 모여 지금껏 제사를 모셔 오고 있다. 송간 선생의 행적을 모은 ‘서재실기(西齊實紀)’는 재동서원 유물관에 보관 중이다. 재동서원의 교지와 교첩 등 고문서 73점이 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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