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비시 강제노역 순천 출신 김성주 할머니 별세
2024년 10월 06일(일) 19:30
일제강점기 꽃다운 나이에 전범기업인 미쓰비시 중공업에 끌려가 강제노역에 시달린 김성주 할머니<사진>가 별세했다. 향년 95세.

또 한 명의 전남 출신 일제강제동원 피해자가 일본과 전범기업의 사과를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일제강제동원 시민모임은 6일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1차 손해배상 소송 원고로 나선 김 할머니가 전날 노환으로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순천남초등학교를 다녔던 그는 13살이던 졸업 직후 1944년 5월 “일본에 가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다”는 일본인 교장의 말에 속아 일본으로 갔다. 학교 대신 나고야 미쓰비시 공장으로 끌려간 그는 해방 후인 1945년 10월까지 1년5개월간 지옥같은 날을 보냈다.

장갑조차 끼지 않고 금속판을 절단하는 일을 하다 왼쪽 손가락 하나가 잘렸고, 1944년 12월 일어난 도난카이 대지진 때는 함께 갔던 친구 6명이 죽었다. 자신도 무릎뼈가 튀어나오는 중상을 입었다.

그에 이어 동생 김정주(93)할머니도 1945년 2월 일본 후지코시 공장으로 강제 동원돼 자매가 같은 아픔을 겪었다.

그는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했음에도 임금 한 푼 받지 못한채 광복 후 고향에 돌아왔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도 일본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일본군 위안부’로 여겨질까 전전긍긍했고, 남편으로부터 인신모욕과 구박을 받아야 했다. 그는 “내 평생 가슴 펴고 큰 길 한번 다녀 보지 못하고, 뒷질(뒷길)로만 살아왔다”고 회상했다.

뒤늦게 용기를 낸 그는 일본의 사과를 받기 위해 활발한 활동에 나섰다. 1992년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일명 ‘천인소송’에 참여했으며, 지난 2018년 11월 29일 결국 대법원 최종 승소 판결을 받아내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3월 서울시 여의도 국회 앞에서 제3자 변제를 거부한 양금덕 할머니와 함께 일본의 사죄 배상을 촉구하는 시국선언에 참여해 “일본 사람들이 우리를 끌고 갔는데, 어디다가 사죄를 받아야 하겠느냐? 일본에게 옛날 몇십 년을 기죽고 살아왔는데 지금도 그렇게 살아야 되겠느냐”고 토로하기도 했다.

한편 김성주 할머니의 빈소는 경기 안양시에 있는 안양장례식장 8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7일 오전 7시 장지는 광주시 북구 동림동 새로나추모관이다.

/장혜원 기자 hey1@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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