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비엔날레 ‘모두의 울림’이 되려면 - 박성천 문화부장·편집국 부국장
2024년 06월 26일(수) 00:00
군대를 제대한 무렵이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인 92년 2월께로 기억한다. 초봄이라 하기에는 한기가 남아 있어 제법 추운 날씨였다. 대학 동기가 부친이 회갑을 맞았다고 했다. 친구의 고향은 고흥이었다, 가까운 대학 동기들 몇이 물어물어 시골로 내려갔다. 도착한 친구 집에는 마당 가득 사람들이 있었고 거나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회갑연은 동네의 중요한 잔치 가운데 하나였다. 평생 농사를 지었던 친구 아버지는 4남매를 모두 광주로 유학 보낼 만큼 열심히 사신 분이었다.

잔치 분위기가 왁자지껄 무르익어갈 무렵, 친구 아버지 동년배로 보이는 어르신이 앞으로 나오셨다. 좌중을 잠시 정리하더니 “오늘 회갑을 맞은 주인공에게 소리 한 소절 들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청을 하셨다. 축하객들은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박수를 쳤다. 친구 아버지는 잠시 주춤하시더니 이내 마당 한가운데로 나오셨다. 동네사람 누군가가 대청마루에 놓여 있는 북을 가져왔다. 이윽고 친구 아버지가 ‘흥부가’ 한 대목을 불렀다. 그런데 웬걸, 수준이 기대 이상이었다. 평생 농사만 짓느라 소리학교 같은 곳에는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을 터인데, 꺾임이나 떨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사람들은 중간 중간 “얼쑤”라는 추임새를 넣었고 어떤 이는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했다. 아름다운 잔치의 한 장면이었다. 아니 신명의 한 판이었다.



판소리 비엔날레 형식에 차용

올해로 창립 30주년을 맞는 제15회 광주비엔날레가 오는 9월 7일 개막한다. 판소리를 모티브로 다채로운 프로그램들이 펼쳐질 예정이어서 소리의 고장인 남도의 문화적 감수성과 DNA가 어떻게 구현될지 기대가 된다. 이번 주제는 ‘판소리-모두의 울림’. 우리의 전통 음악인 판소리를 은유로 인류 보편적 현안 문제를 탐구한다는 게 기획 의도인 것 같다.

니콜라 부리오 감독은 지난해 진행된 주제 발표에서 “한국의 판소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땅과 관련된 장르라는 특성 때문”이라며 “지역과 지리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판소리를 비엔날레 형식에 차용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의 말은 한국적인 것을 모티브로 세계 보편성의 미학을 다채롭게 구현하겠다는 취지로 읽힌다. 향후 공간적 조건과 인류세를 반영하는 작품들이 어떻게 구현될 지 기대가 커지는 대목이다.

세계무형문화유산인 판소리는 우리의 전통 음악이자 고전문학이며 연극이다. 다양한 장르로 포괄되는 것은 그만큼 판소리의 특질인 개방성이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자가 고수 장단에 맞춰 노래를 한다는 면에서는 음악이며, 민담이나 설화 등이 책으로 엮어진 결과물로 볼 때는 문학에 해당한다. 또한 판소리 광대들이 연행의 형태로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관점에서는 극예술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판소리가 언제 시작됐는지 그 기원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다. 학자들은 17세기 후반 기층 민중의 삶과 정서를 토대로 시작됐다고 본다. 그러다 18세기 양반계층은 물론 이후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왕족에까지 향유층이 확대되면서 판소리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예술로 자리를 잡았다. 당시 하층민에서 시작됐던 판소리가 최상계층인 왕족들까지 즐기는 대중 장르가 됐던 것은 보편성, 개방성 등 다양한 요인이 결부됐기 때문일 것이다.

언급한대로 올해 창립 30주년을 맞은 광주비엔날레는 ‘판소리-모두의 울림’을 주제로 상정했다. 판소리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도 시각적 형상화를 특정 공간 내에 구현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일 것 같다.

올해로 129년 역사를 자랑하는 베니스 비엔날레(4월20일~11월 24일)는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상 최초 남미 출신 아드리아노 페드로사를 총감독으로 선임한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이방인은 어디에나 있다’라는 주제의 강렬함이 인상적이다. 페드로사 감독은 주류와 규범 뒤에 가려진 이방인을 전면에 내세웠다. 난민이나 외국인 등 지정학적 개념을 뛰어넘는 어디에나 있는 경계인, 아웃사이더를 바로 이방인으로 봤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이방인일 수 있으며, 환대받지 못한 모든 이들은 이방인이라는 카테고리에 수렴될 것이다.



마당으로 대변되는 공동체정신

그렇듯 베니스비엔날레는 보편성, 개방성, 특수성을 아우르는 주제를 구현하고 있다. 제15회 광주비엔날레의 ‘판소리’ 또한 지역의 특수성과 세계무형문화유산이라는 보편성을 절묘하게 융합한 주제다. 전시와 프로그램 등 하나하나의 구슬을 어떻게 잘 꿰어 가치있는 보석으로 만드느냐는 광주비엔날레의 몫이다.

오래 전 친구 아버지의 회갑잔치 한 장면을 떠올려본다. 겨울의 끝자락, 손을 불어가며 시골 마당에 모인 아이들과 아저씨와 아주머니, 그리고 허리 굽은 노인들이 “얼쑤” 추임새를 넣어가며 불렀던 판소리 한 대목의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것의 울림은 여느 악기, 여느 가수의 노래에 비할 바 아니다. 광주비엔날레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마당’으로 대변되는 우리 고유의 공동체정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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