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누정 원림-전남 <2> 담양 소쇄원] 혼탁한 세상 빠져나와 옛 선비들의 풍류 느껴보자
2024년 04월 28일(일) 19:25 가가
[한국학호남진흥원-광주일보 공동기획]
조선시대 선비 양산보가 건립
스승 조광조 기묘사화로 억울한 죽음
출사의 꿈 버리고 1519년 낙향
송순·김인후·정철 등 당대 문사들 교류
제월당·광풍각·대봉대 청량함 가득
자연 속 시문 지으며 시대 불운 달래
조선시대 선비 양산보가 건립
스승 조광조 기묘사화로 억울한 죽음
출사의 꿈 버리고 1519년 낙향
송순·김인후·정철 등 당대 문사들 교류
제월당·광풍각·대봉대 청량함 가득
자연 속 시문 지으며 시대 불운 달래
그 누정을 찾아가는 길은 설렌다. 귀가 즐겁다. 눈이 즐겁다. 코와 입까지 즐겁다 하면 과장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목구비가 시원해지고 맑아진다면 더 이상 수사가 필요 없다. 그저 떠올리는 것으로도 심신이 맑아진다. 한번쯤 빈 마음으로 찾아갈 볼 일이다.
혹자는 오늘을 난마와 같은 세상이라 한다. 어떤 이는 얽히고설킨 매듭 같은 세상이라고 한다. 끝을 알 수 없는, 도무지 출구라고는 보이지 않는 꽉 막힌 시국이란다.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벼랑 끝으로 모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또 얼마나 많이 벌어지는가. 공정을 거론하면서 공정을 뒤트는, 상식을 말하면서 상식을 전복시키는 ‘상상 너머의 일’들이 횡행한다. 그러는 사이 필부필부들의 삶은 위태롭다. 살림살이는 점점 팍팍해지고 일상은 녹록지 않다. 소리라도 지르면 좋으련만 속내 한 자락 슬며시 보여주기도 아심찮다. 복잡한 세상이다. 빈 머리, 빈 가슴으로 살기에는 저류의 이면들이 간단치 않다.
이런 날은 그저 떠나는 것이다. 깨끗하고 시원한 소리를 들으러 가는 것이다.
소쇄원은 그곳에 있다. 한달음에 가도 좋을 남도의 서정과 서경을 간직한 우리들의 누정이다. 모시조개의 은은한 무늬결 같은 미를 떠올리게 한다. 언덕에 살포시 앉은 소담하면서도 빛나는 아우라는 무엇에 견줄 바 없다. 새색시의 고운 자태와 소녀의 단아함, 귀부인의 기품 같은 분위기가 어우러져 있다.
‘소쇄’(瀟灑)라는 뜻은 얼마나 그윽하며 맑은가. 물 맑고 깊을 ‘소’(瀟), 깨끗할 ‘쇄’(灑)는 일반의 청(淸)과 깨끗함의 경지를 넘는다. 가만가만 물소리 듣고 있노라면 청신경이 맑아지고 내면의 얼룩마저 말끔히 씻겨지는 것 같다.
소쇄원은 광주와 담양이 이웃하는 광주호 상류 인근(남면 지곡리)에 자리한다. 무등산 원효계곡이 광주호로 흘러드는 증암천 기슭, 어디를 둘러봐도 승경천지다. ‘소쇄’는 중국 남조시대 공덕장이라는 이가 쓴 ‘북산이문’에 나오는 말이다.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의미인데, 눈으로 읽는 ‘소쇄’보다 직접 ‘소쇄’라고 읊조려야 제맛이 난다. 그러면 마치 풍경에 내가 들어앉아 물아일체의 경지에 든 것처럼 느껴진다.
소쇄원은 조선의 선비 양산보(1503~1557)가 지었다. 자는 언진(諺眞)이며 호는 소쇄공(瀟灑公), 소쇄옹(瀟灑翁). 양산보는 청운의 뜻을 품고 15세에 정암 조광조(1482~1519)의 문하에 들어간다. 그러나 당시는 불의한 시대였다. 조광조는 바른 정치를 주창하다 기묘사화에 연루돼 죽임을 당한다. 양산보는 스승의 유배지인 화순 능주에까지 따라갔던 마지막 제자였다. 그의 천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스승이 유배지에서 무참하게 사약을 받고 죽게 되자, 제자는 출사에 대한 꿈을 버린다. 세상의 부귀영화는 덧없던 것이리라.
고향에 은거하면서 양산보는 자신만의 ‘소쇄원’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오늘의 소쇄원 전체를 양산보가 모두 조영했다고 보기는 무리한 면이 있다. 학자들 견해에 따르면 대봉대 인근 초정을 비롯해 일부 조영을 시작했다는 의미로 보는 게 타당할 것 같다.
한국학호남진흥원 2대 원장을 역임했던 천득염 전남대 건축학부 석좌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김인후가 1528년에 읊은 시 ‘소쇄정즉사’(瀟灑亭卽事)에 소쇄정에 관한 간접적인 내용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1520년대 말에는 아직 소쇄원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하지만 소쇄정으로 불리는 초기적인 원림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소쇄정이라는 명칭은 1534년에 지은 송순의 시 ‘종제양언진소쇄정’(從弟梁彦鎭瀟灑亭)에도 나타난다. 소쇄원이라는 명칭은 1576년 정철이 지은 ‘소쇄원제초정’(瀟灑園題草亭)이란 시에서 비로소 나타나는데, 이 시에 따르면 자기가 태어날 때인, 즉 1536년에 소쇄원을 세운 것이라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고, ‘소쇄정’을 ‘소쇄원’으로 바꾸어 부르는 등의 변화가 있다.”(천득염 ‘소쇄원’, 광주문화재단, 2018).
아울러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 48영’을 비롯해 고경명의 ‘유서석록’, 후대에 기록된 ‘소쇄원사실’ 등에도 기록이 나와 있다. 이외에도 정철과 송순의 자료에도 언급돼 있다.
이러저러한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학자들은 양산보가 낙향한 1519년을 소쇄원의 시작점으로 추정한다.(당시는 정자 한 곳 정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누정은 확장이 돼, 원(園)의 양식을 이뤘는데 양산보 말년에 이르러서였다. 아들인 자징과 자정 대에 고암정사와 부훤당이 들어서면서 별서원림의 모습을 갖췄다. 이후 정유재란 병화로 건물이 불에 타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지만 손자인 천운이 1614년 복원했다.
소쇄원에 들어서면 맑은 소리와 조우한다. 대봉대와 광풍각 그리고 제월당의 모습도 좋지만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심중을 소란히 일깨운다. 동쪽으로 내뻗은 긴 담장은 옛 친구처럼 다정스레 팔을 건네고 산마루에서 낙수하듯 흘러내린 물은 계곡을 구석구석 적시며 아래로 향한다. 증암천으로 흘러든 물은 종내엔 영산강으로 합류할 것이다.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민망하리만큼 청랑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세운다. 이름 모를 새들이 머물다 간 자리에 바람만이 휑하니 서늘하다.
버려라, 버려라, 버려라, 그리고 또 버려라. 잊어라, 잊어라, 잊어라, 또 잊어라. 손부채처럼 댓잎들이 서걱이며 들려주는 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춘다. 버릴 것은 세상의 욕심이요, 잊을 것은 헛된 꿈이요 허명이라. 그리고 불현듯 찾아드는 이기와 욕망이라.
처사 양산보는 이곳에 들면서 도를 마음에 담았다. 안타깝게도 때를 만나지 못했지만 그의 의로운 뜻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그는 소쇄원에 들어 시문을 짓고 선비들과 교유하며 정도를 걸었다. 그에 반해 오늘의 어느 선비들은 높은 곳만 바라보며 곡학과 곡법, 곡해를 서슴지 않는다. 유리한 곳을 찾아 무리지어 다니며 부화뇌동을 일삼는다. 선비다운 선비가 그리운 시절이지만 마주하기가 힘든 세태다. ‘철새’만도 못한 ‘철새’들이 들끓는 세상이다.
소쇄원에는 당대 문사들의 출입 흔적과 문장들이 남아 있다. 기록에 따르면 70명의 선비들이 이곳에 들렀다. 송순과 김인후는 소쇄원 조영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줬다. 기대승, 정철, 고경명, 임억령 등 이름있는 인사들도 이곳을 드나들며 시문을 짓고 당대의 현실에 대한 통분을 달랬다.
물소리 새소리 벗삼아 제월당, 광풍각, 대봉대를 알현하며 처사의 삶을 살았던 조선의 심지 굳은 선비를 생각한다. 혹여 어디선가 그 선비가 나타날까 싶어 자꾸 두리번거린다. 시문에 혁혁한 문인들의 시정도 느껍게 다가온다. 선비 양산보가 있어 오늘 소쇄원이 빛난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소쇄’(瀟灑)라는 뜻은 얼마나 그윽하며 맑은가. 물 맑고 깊을 ‘소’(瀟), 깨끗할 ‘쇄’(灑)는 일반의 청(淸)과 깨끗함의 경지를 넘는다. 가만가만 물소리 듣고 있노라면 청신경이 맑아지고 내면의 얼룩마저 말끔히 씻겨지는 것 같다.
소쇄원은 광주와 담양이 이웃하는 광주호 상류 인근(남면 지곡리)에 자리한다. 무등산 원효계곡이 광주호로 흘러드는 증암천 기슭, 어디를 둘러봐도 승경천지다. ‘소쇄’는 중국 남조시대 공덕장이라는 이가 쓴 ‘북산이문’에 나오는 말이다.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의미인데, 눈으로 읽는 ‘소쇄’보다 직접 ‘소쇄’라고 읊조려야 제맛이 난다. 그러면 마치 풍경에 내가 들어앉아 물아일체의 경지에 든 것처럼 느껴진다.
소쇄원은 조선의 선비 양산보(1503~1557)가 지었다. 자는 언진(諺眞)이며 호는 소쇄공(瀟灑公), 소쇄옹(瀟灑翁). 양산보는 청운의 뜻을 품고 15세에 정암 조광조(1482~1519)의 문하에 들어간다. 그러나 당시는 불의한 시대였다. 조광조는 바른 정치를 주창하다 기묘사화에 연루돼 죽임을 당한다. 양산보는 스승의 유배지인 화순 능주에까지 따라갔던 마지막 제자였다. 그의 천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스승이 유배지에서 무참하게 사약을 받고 죽게 되자, 제자는 출사에 대한 꿈을 버린다. 세상의 부귀영화는 덧없던 것이리라.
고향에 은거하면서 양산보는 자신만의 ‘소쇄원’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오늘의 소쇄원 전체를 양산보가 모두 조영했다고 보기는 무리한 면이 있다. 학자들 견해에 따르면 대봉대 인근 초정을 비롯해 일부 조영을 시작했다는 의미로 보는 게 타당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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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봉대 |
아울러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 48영’을 비롯해 고경명의 ‘유서석록’, 후대에 기록된 ‘소쇄원사실’ 등에도 기록이 나와 있다. 이외에도 정철과 송순의 자료에도 언급돼 있다.
이러저러한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학자들은 양산보가 낙향한 1519년을 소쇄원의 시작점으로 추정한다.(당시는 정자 한 곳 정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누정은 확장이 돼, 원(園)의 양식을 이뤘는데 양산보 말년에 이르러서였다. 아들인 자징과 자정 대에 고암정사와 부훤당이 들어서면서 별서원림의 모습을 갖췄다. 이후 정유재란 병화로 건물이 불에 타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지만 손자인 천운이 1614년 복원했다.
소쇄원에 들어서면 맑은 소리와 조우한다. 대봉대와 광풍각 그리고 제월당의 모습도 좋지만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심중을 소란히 일깨운다. 동쪽으로 내뻗은 긴 담장은 옛 친구처럼 다정스레 팔을 건네고 산마루에서 낙수하듯 흘러내린 물은 계곡을 구석구석 적시며 아래로 향한다. 증암천으로 흘러든 물은 종내엔 영산강으로 합류할 것이다.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민망하리만큼 청랑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세운다. 이름 모를 새들이 머물다 간 자리에 바람만이 휑하니 서늘하다.
버려라, 버려라, 버려라, 그리고 또 버려라. 잊어라, 잊어라, 잊어라, 또 잊어라. 손부채처럼 댓잎들이 서걱이며 들려주는 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춘다. 버릴 것은 세상의 욕심이요, 잊을 것은 헛된 꿈이요 허명이라. 그리고 불현듯 찾아드는 이기와 욕망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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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 입구 양편으로 펼쳐진 푸른 대나무숲. |
소쇄원에는 당대 문사들의 출입 흔적과 문장들이 남아 있다. 기록에 따르면 70명의 선비들이 이곳에 들렀다. 송순과 김인후는 소쇄원 조영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줬다. 기대승, 정철, 고경명, 임억령 등 이름있는 인사들도 이곳을 드나들며 시문을 짓고 당대의 현실에 대한 통분을 달랬다.
물소리 새소리 벗삼아 제월당, 광풍각, 대봉대를 알현하며 처사의 삶을 살았던 조선의 심지 굳은 선비를 생각한다. 혹여 어디선가 그 선비가 나타날까 싶어 자꾸 두리번거린다. 시문에 혁혁한 문인들의 시정도 느껍게 다가온다. 선비 양산보가 있어 오늘 소쇄원이 빛난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