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시점을 향한 욕망에 대하여 - 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2024년 03월 11일(월) 00:00 가가
쓸모없는 온갖 정보가 넘쳐날수록, 역설적으로 아는 것이 힘이라는 명제는 설득력을 얻는다. 왜 우리는 금방 잊혀지고 사라질 시시한 정보 나부랭이에는 집착하면서 정작 중요한 문제는 관심조차 없을까? 이런 일은 일상의 전지적 시점을 공유하고 싶은 욕망에서 시작된다. 원래 전지적 시점은 문학 작품 속 모든 인물의 내면을 관통하며 사건의 시작과 결말을 이미 아는 입장에서 서술하는 방식이다. 일상에서 겪는 전지적 시점은 주변의 모든 일을 미리 다 알아서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어떤 결과가 될 것인지를 아는 것처럼 확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소한 정보의 공유를 통해서 전지적인 ‘우리’의 집단을, 즉 주류를 형성한다. 이런 구조를 통해서 개인들의 어리석음과는 별개로 집단의 목소리는 언제나 크다. 마치 전지적 신처럼 모든 것을 미리 다 아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군림하고자 하는 ‘우리’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 ‘전지적 시점’이라는 표현은 사람에게는 쓸 수가 없다. 무제한적이고 전권적인 능력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과 같은 존재의 능력자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전지적 능력에 대한 욕망에 우리는 쉽게 지배되면서, 열심히 전지적 시점의 주류 언어를 사용한다.
신화의 제우스 신 정도라면 전지적 시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 제우스는 아버지로부터 빼앗은 권력으로 올림포스 12신의 왕 노릇을 하는 위치에 올랐다. 번개를 무기로 사용하며 아무 때나 원하는 모습으로 변신하는 신이다. 하지만 제우스는 알려진 것과는 달리 현명하고 공명정대하게 행동하려고 애쓰며 늘 세상 돌아가는 일을 세심하게 살폈다. 고전 ‘일리아스’에 나오는 이야기다. 제우스는 늘 눈과 귀를 열어두고 있어서 세상일을 먼저 알았다. 어느 날 제우스는 트로이 전쟁에 나간 자신의 아들이 곧 죽음을 맞게 될 것을 알게 된다. 자식의 죽음은 사람에게만 고통이 아니고 신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괴로워하던 제우스는 결국 헤라에게 고통을 털어놓는다. 사실 제우스는 조용히 아들을 얼마든지 살릴 능력이 있고, 또 그렇게 한들 감히 누가 비난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제우스는 헤라에게 물었고 헤라는 최고의 신이면 지켜야 할 법과 원칙에 따라서 공정하게 행동하라고 냉정하게 조언한다. 그리고 헤라는 아무리 제우스 아들이지만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제우스는 왜 굳이 헤라에게 물었을까? 죽음을 앞에 둔 아들은 헤라와의 사이에 태어난 것도 아니다. 제우스는 정말 혼자서 판단을 내릴 수 없었을까? 아니면 사실은 자신의 절대권력으로 아들을 살려내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내린 후에 헤라에게 물은 것일까? 헤라에게 직접 자신의 막강한 힘이 사사롭게 쓰여서는 안 되는 것을 다짐받고 싶은 것이었을까? 결국 제우스는 늘 사이가 좋기만 한 것도 아닌 헤라의 말을 수용하고, 아들은 죽는다. 적어도 이 대목에서 제우스는 전지적 시점과 능력을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함부로 휘두르지 않는다.
사실 엄밀하게 보면 전지적 시점은 절대적 힘을 가진 우월적 위치에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시선이자 태도다. 다시 말하면 옳고 그름을 좌우하는 결정권을 행사하는 힘이다. 예를 들면 중요한 것을 판단하는 권력자와 권위자의 시선, 전문가의 시선, 강자의 시선 등이 현실적 일상에서 전지적 시점으로 행세한다. 하지만 전지적이라고 해서 전능한 것이 아니고, 전지와 전능은 서로를 보완해야 한다. “그렇게 될 줄 이미 알고 있었다”, “아직도 그것을 몰랐다니, 바보군” 등의 전지적 시선만으로는 변화하는 것은 없다.
최근 한 외국 작가가 한국에서 한 경험을 담은 영상에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를 여행했다”라는 제목을 달았다. 온갖 다양한 화려함과 최신의 기술문명, 세계가 주목한다는 고급의 소비시장 등. 이 모든 정보가 넘쳐도 여전히 ‘주류’에 속하지 못하거나, 억압과 수치를 당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원인으로 봤다. 제우스는 아들을 살릴 수 있는 전지적, 전능의 힘을 가졌지만 쓰지 않았다. 타의에 의해서 강제된 비주류의 삶에 대한 제우스적 고민과 결단이 절실하지 않은가?
사실 엄밀하게 보면 전지적 시점은 절대적 힘을 가진 우월적 위치에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시선이자 태도다. 다시 말하면 옳고 그름을 좌우하는 결정권을 행사하는 힘이다. 예를 들면 중요한 것을 판단하는 권력자와 권위자의 시선, 전문가의 시선, 강자의 시선 등이 현실적 일상에서 전지적 시점으로 행세한다. 하지만 전지적이라고 해서 전능한 것이 아니고, 전지와 전능은 서로를 보완해야 한다. “그렇게 될 줄 이미 알고 있었다”, “아직도 그것을 몰랐다니, 바보군” 등의 전지적 시선만으로는 변화하는 것은 없다.
최근 한 외국 작가가 한국에서 한 경험을 담은 영상에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를 여행했다”라는 제목을 달았다. 온갖 다양한 화려함과 최신의 기술문명, 세계가 주목한다는 고급의 소비시장 등. 이 모든 정보가 넘쳐도 여전히 ‘주류’에 속하지 못하거나, 억압과 수치를 당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원인으로 봤다. 제우스는 아들을 살릴 수 있는 전지적, 전능의 힘을 가졌지만 쓰지 않았다. 타의에 의해서 강제된 비주류의 삶에 대한 제우스적 고민과 결단이 절실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