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 ‘막걸리’… 재심 또 재심 - 윤영기 사회·체육담당 부국장
2024년 01월 24일(수) 00:00 가가
장모씨는 2003년 7월 자신이 몰던 차량이 저수지에 추락하는 바람에 아내를 잃었다. 그는 빠져나왔으나 아내는 차 안에서 익사했다. 애초 경찰은 평소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부부 공동명의로 다수 보험에 가입했다는 점을 들어 장씨를 의심했다. 다각적인 조사에도 뚜렷한 물증이 없자 경찰은 장씨를 교통사고특례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넘겼다. 검찰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수사 끝에 장씨가 아내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입증해 무기징역 선고를 이끌어냈다. 보험금을 노리고 아내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차량을 저수지에 빠트려 숨지게 했다는 공소 사실이 법원에서 인정됐다. 시종일관 범행을 부인했던 장씨는 만 19년째 감옥에 갇혀있다.
◇신뢰 잃은 수사결과
그가 최근 대법원의 재심결정으로 다시 재판을 받게됐다. 그런데 판결문을 보면 사법체계가 작동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우선 절차적 정당성의 실종이다. 경찰은 사고차량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보낸 날짜를 조작하는 등 허위 공문서(압수조서)를 작성했다. 수사의 ABC가 지켜지지 않은 하자 때문에 이미 예견된 실패다. 법원은 공소시효가 지났지만 경찰관들이 공문서 위조죄를 범했다고 판단했다. 경찰관들은 성경책을 보려고 성당에서 초를 훔쳐도 절도죄를 묻는 게 법의 냉정한 원칙이라는 사실을 망각했다.
재심의 핵심 사유는 무죄를 반증하는 새로운 증거가 아니라 경찰과 검찰의 수사력을 의심케 하는 사안이다. 검찰의 공소장에 따르면 장씨는 차가 물에 빠졌을 때 쉽게 전면 유리창이 분리돼 물이 빨리 들어차도록 차 안의 햇빛가리개를 미리 제거했다. 자신은 쉽게 빠져나오고 잠든 아내를 익사시키려는 의도였다. 국과수 감정인의 “좌우측 햇빛가리개 고정대 분리와 천장 모서리 파손은 저수지 추락 후 화물차 전면 유리 이탈과 관련될 가능성이 있다”는 감정서가 토대가 됐다. 햇빛가리개가 전면 유리창을 고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떼어내면 차가 충격을 받을 경우 쉽게 분리될 수 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차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게는 햇빛가리개가 전면 유리와 무관하다는 건 상식이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국과수의 감정결과가 살인의 입증자료가 됐고 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하는 유죄의 증거로 인용됐다. 더 허망한 일은 당시 감정을 했던 국과수 관계자가 재심 결정과정에서 변호인이 이 부분을 파고들자 감정을 철회해버렸다는 사실이다.
장씨의 유·무죄는 재심에서 다투겠지만 내가 묻고 싶은 건 수사·재판에서 대원칙이 지켜지고 있느냐다.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수사의 기본과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라는 형사재판의 원칙이 적용됐는지다. 유죄를 예단하고 밀어붙인 검찰은 차치하고라도 재판부의 판단도 아쉽다. 수사기록에 묻혀 있는 피고인의 목소리에 한번쯤이라도 귀기울였으면 어떤 판단이 나왔을까 궁금하다. 최소한 판결문 말미에 써넣은 ‘피고인이 범의를 전면 부인할 뿐 아니라 자기변명에 급급한 인면수심을 보이고 있다’는 표현은 바뀌었을 것이다.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도 마찬가지다. 2009년 7월 청산가리를 넣은 막걸리를 마신 주민 2명이 숨지고 2명이 다친 사건이다. 공범으로 지목된 부녀의 아내이자 어머니가 사망자에 포함돼 있었다. 광주고법은 최근 살인·존속살해 등 혐의로 대법원에서 무기징역과 20년 형이 확정됐던 아버지와 딸의 재심을 결정했다.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형의 집행정지 결정을 내리고 부녀를 감옥에서 풀어줬다. 검찰은 곧바로 대법원에 항고했다. 재판부가 검사의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죄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딸의 자백을 이끌어내는 신문 과정에서 검사가 수사권을 남용했다는 것이다. 변호인이 제출한 피의자 신문 영상을 살핀 후 내린 결론이다.
◇사람을 중심에 둔 수사·재판 절실
재판부는 “검사가 진술을 이끌어내 검사의 생각을 주입하며 유도신문을 하거나 수사 방향을 단정적으로 제시하는 등의 방법을 사용했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에서 딸은 ‘청산가리와 막걸리를 구해 마당에 놓아 어머니가 마시게 했다’고 진술했다. 재판부의 판단으로 증언의 법적 효력이 배척됐으나, 결정적으로 검찰은 본분을 저버린 셈이 됐다. ‘검사는 공익의 대표자로서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고 적법절차를 준수하며,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고 주어진 권한을 남용해서는 안된다’는 법(검찰청법 4조)을 어겼다.
미국인이 가장 신뢰하고 존경하는 검사 프릿 바라라는 ‘정의는 어떻게 실현되는가’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정의를 목표로 수사에 착수한다면, 특정 결과에 얽매여 어떤 주장을 미리 상정해서는 안된다. 열린 자세를 보인다는 것은 편견없이 수사를 진행한 것이다. 언제나 사실로부터 주장을 이끌어내는 것이지, 주장으로부터 사실을 이끌어내서는 안된다.” 검사와 판사는 기본적으로 예단이나 확신이 아니라 팩트(Fact)와 양심에 복무하는 직업이다. 수사와 판결도 피해자의 원한을 풀어주고 범인을 단죄하는 데만 있지 않다. 이런 일은 법 기술자의 전유물이다. 사람을 중심에 두고 수사하고 판결하는 법조인이 많아져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정의 아닐까.
그가 최근 대법원의 재심결정으로 다시 재판을 받게됐다. 그런데 판결문을 보면 사법체계가 작동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우선 절차적 정당성의 실종이다. 경찰은 사고차량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보낸 날짜를 조작하는 등 허위 공문서(압수조서)를 작성했다. 수사의 ABC가 지켜지지 않은 하자 때문에 이미 예견된 실패다. 법원은 공소시효가 지났지만 경찰관들이 공문서 위조죄를 범했다고 판단했다. 경찰관들은 성경책을 보려고 성당에서 초를 훔쳐도 절도죄를 묻는 게 법의 냉정한 원칙이라는 사실을 망각했다.
장씨의 유·무죄는 재심에서 다투겠지만 내가 묻고 싶은 건 수사·재판에서 대원칙이 지켜지고 있느냐다.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수사의 기본과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라는 형사재판의 원칙이 적용됐는지다. 유죄를 예단하고 밀어붙인 검찰은 차치하고라도 재판부의 판단도 아쉽다. 수사기록에 묻혀 있는 피고인의 목소리에 한번쯤이라도 귀기울였으면 어떤 판단이 나왔을까 궁금하다. 최소한 판결문 말미에 써넣은 ‘피고인이 범의를 전면 부인할 뿐 아니라 자기변명에 급급한 인면수심을 보이고 있다’는 표현은 바뀌었을 것이다.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도 마찬가지다. 2009년 7월 청산가리를 넣은 막걸리를 마신 주민 2명이 숨지고 2명이 다친 사건이다. 공범으로 지목된 부녀의 아내이자 어머니가 사망자에 포함돼 있었다. 광주고법은 최근 살인·존속살해 등 혐의로 대법원에서 무기징역과 20년 형이 확정됐던 아버지와 딸의 재심을 결정했다.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형의 집행정지 결정을 내리고 부녀를 감옥에서 풀어줬다. 검찰은 곧바로 대법원에 항고했다. 재판부가 검사의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죄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딸의 자백을 이끌어내는 신문 과정에서 검사가 수사권을 남용했다는 것이다. 변호인이 제출한 피의자 신문 영상을 살핀 후 내린 결론이다.
◇사람을 중심에 둔 수사·재판 절실
재판부는 “검사가 진술을 이끌어내 검사의 생각을 주입하며 유도신문을 하거나 수사 방향을 단정적으로 제시하는 등의 방법을 사용했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에서 딸은 ‘청산가리와 막걸리를 구해 마당에 놓아 어머니가 마시게 했다’고 진술했다. 재판부의 판단으로 증언의 법적 효력이 배척됐으나, 결정적으로 검찰은 본분을 저버린 셈이 됐다. ‘검사는 공익의 대표자로서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고 적법절차를 준수하며,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고 주어진 권한을 남용해서는 안된다’는 법(검찰청법 4조)을 어겼다.
미국인이 가장 신뢰하고 존경하는 검사 프릿 바라라는 ‘정의는 어떻게 실현되는가’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정의를 목표로 수사에 착수한다면, 특정 결과에 얽매여 어떤 주장을 미리 상정해서는 안된다. 열린 자세를 보인다는 것은 편견없이 수사를 진행한 것이다. 언제나 사실로부터 주장을 이끌어내는 것이지, 주장으로부터 사실을 이끌어내서는 안된다.” 검사와 판사는 기본적으로 예단이나 확신이 아니라 팩트(Fact)와 양심에 복무하는 직업이다. 수사와 판결도 피해자의 원한을 풀어주고 범인을 단죄하는 데만 있지 않다. 이런 일은 법 기술자의 전유물이다. 사람을 중심에 두고 수사하고 판결하는 법조인이 많아져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정의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