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하는 것, 그것은 용기다 - 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2024년 01월 15일(월) 00:00 가가
푸른 용의 이름을 가진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한다. 하지만 새해라고 해서 새로울 것이 뭐가 있느냐는 말도 들린다. 세상은 기대할 것도, 희망할 것도 없다는 헛헛함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사실 사방 모든 생기가 얼어붙은 듯, 공허하고 요란스러운 말장난만 오가는 것을 보자면, 다른 말을 듣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변화도 성장도 없다면, 퇴행과 정체의 시간을 사는 것이라는 의미다. 그렇다고 시간은 언제나 제 속도로 흐르니 앞당겨 써서 없애거나, 그냥 시간을 조용히 피해 갈 수 없다.
시간의 본질은 빈 화폭이나 그릇과 같다. 무엇을 그리며, 어떤 것을 담느냐에 따라서 시간의 가치와 결과는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앞에 놓인 허락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이며, 무엇을 위해서 쓸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 속에 있다. 새해가 마치 희망할 것이 없어 보여도 우리는 새로운 시간을 살아야 한다. 시간은 우리가 품은 희망의 실천과 행위의 결과로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다.
희망에는 두려움도 항상 함께 한다. 희망하는 것은 단순히 행운을 기다리는 대신에 실천을 통해서 새 변화를 만드는 것이니, 두려움 또한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희망하는 것은 두려움에 맞서는 용기다. 먼저 자신이 진심으로 희망하는 것을 알 때 비로소 희망을 향해서 나갈 수 있다. 막연히 원하고 기다리는 것은 희망이 아니다. 용기 없는 희망은 공허한 기대와 무책임한 바람이며 우연한 행운에 대한 탐욕이다. 사람은 개인의 사적인 희망과 ‘나’의 집합체인 사회적, 공적인 영역에 대한 희망을 품는다. 사실 이 둘은 나눠진 것이 아니고, 서로 깊게 연동되어 있다. 개인적 희망과 공동체적인 희망의 실현은 서로 교차하고 관통하는 지점에서 가능하다. 완전히 개인적인 것도 없고, 오롯이 공적인 것만도 없다는 의미다.
고대 그리스에 있었던 여러 제도 중 하나인 도편추방제에 관해서 매우 의미심장한 일화가 있다. 이 도편추방제는 국가의 지도자 중 특정 인물을 추방할 때 사용되는 방식이었다. 추방하고 싶은 특정 사람의 이름을 도편에 쓰는데, 가장 많이 언급된 사람이 추방되었다. 이 도편 추방과 관련된 일화의 주인공이 아리스티데스이다. 그는 아테네의 중요한 정치가이며 전쟁영웅으로, ‘공정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불렸다. 아리스티데스의 지도자적 탁월함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이런 호칭을 시민에게서 듣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매일 목격한다. 아리스티데스는 당시 막강한 경쟁 관계에 있는 권력자와 갈등이 커졌고 결국 도편 추방을 당했다. 여기서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것은 정해진 제도로 인해서 자신에게 불리해진 상황에 대한 태도다.
이야기에 의하면 아리스티데스를 모르는 한 문맹 투표자가 도편에 아리스티데스의 이름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아리스티데스는 문맹자에게 도편에 써달라는 사람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투표자는 “잘못은 없고 또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어디서든 그를 공명정대한 사람이라고 하는 얘기를 듣는 것이 짜증이 난다”라고 했다. 물론 아리스티데스는 자신의 이름을 도편에 썼다. 또 다른 이야기는 도편제도가 무엇인가를 묻는 사람들에게 도편에 자신의 이름을 써서 보여주면서 설명했다고 한다. 추방될 줄 알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썼고, 심지어는 다른 정적의 이름을 쓴다 한들 문맹인이 알 턱이 없는 상황에서도 속이지 않았다.
이 일화는 공적 영역에서도 개인의 품격과 공명정대한 윤리 의식이 결정적인 조건임을 확실히 보여 준다. 권력자가 힘으로 겁박하는 대신에 무지하다고 해도 모든 시민에게 공정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정의로움이다. 또한 권력을 가진 자의 진정한 힘과 명예는 자신의 의무와 책임에 기꺼이 승복하는 것임을 일화에서 본다. 시민은 길들여지는 개인들의 무리에 대한 호칭이 아니고, 순종하는 품삯으로 주는 공로패도 아니다. 누구나 스스로 시민적 삶을 희망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시민이다. 그래서 개인이자 시민인 우리가 새롭게 희망하는 것은 곧 용기이며, 새로운 시작이다. 두려움 없이 나가는 우리를, 다르기에 더욱 환대하는 서로를 희망하자. 사람다움을 희망하는 용기를 희망하자.
이야기에 의하면 아리스티데스를 모르는 한 문맹 투표자가 도편에 아리스티데스의 이름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아리스티데스는 문맹자에게 도편에 써달라는 사람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투표자는 “잘못은 없고 또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어디서든 그를 공명정대한 사람이라고 하는 얘기를 듣는 것이 짜증이 난다”라고 했다. 물론 아리스티데스는 자신의 이름을 도편에 썼다. 또 다른 이야기는 도편제도가 무엇인가를 묻는 사람들에게 도편에 자신의 이름을 써서 보여주면서 설명했다고 한다. 추방될 줄 알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썼고, 심지어는 다른 정적의 이름을 쓴다 한들 문맹인이 알 턱이 없는 상황에서도 속이지 않았다.
이 일화는 공적 영역에서도 개인의 품격과 공명정대한 윤리 의식이 결정적인 조건임을 확실히 보여 준다. 권력자가 힘으로 겁박하는 대신에 무지하다고 해도 모든 시민에게 공정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정의로움이다. 또한 권력을 가진 자의 진정한 힘과 명예는 자신의 의무와 책임에 기꺼이 승복하는 것임을 일화에서 본다. 시민은 길들여지는 개인들의 무리에 대한 호칭이 아니고, 순종하는 품삯으로 주는 공로패도 아니다. 누구나 스스로 시민적 삶을 희망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시민이다. 그래서 개인이자 시민인 우리가 새롭게 희망하는 것은 곧 용기이며, 새로운 시작이다. 두려움 없이 나가는 우리를, 다르기에 더욱 환대하는 서로를 희망하자. 사람다움을 희망하는 용기를 희망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