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회사 영업사원이 펴낸 첫 시집 ‘눈길’
2023년 11월 14일(화) 17:45
보성 출신 박봉규 시인 ‘안산행 결차를 기다린다’ 펴내
90년대 중반 오월문학상, 영남일보 신춘문예 등단
“재치 있는 언어는 사람의 기분을 유쾌하게 만든다. 그런 사람 만나면 즐겁다. 그런 삶이 되고자 한다.”

보성 출신 박봉규 시인의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박 시인을 만나면 즐겁다. 유쾌한 데다 가끔씩 정곡을 찌르는 말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시인의 자질이 풍부한 그가 어떻게 오랜 시간 “자본주의 최전선으로 일컫는 영업 (제약회사)쪽 일”을 해왔는지 의아할 뿐이다.

그는 90년대 중반 오월문학상과 영남일보 신춘문예로 일찍이 시인이라는 ‘명패’를 달았다. 하지만 그는 시인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다. 그동안 목수로, 기자로 제약사 영업사원 등으로 직업을 바꿔가며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유쾌하면서도 쓸쓸하게’ 살았다.

박 시인이 최근 첫 시집을 펴내 눈길을 끈다.

작품집 ‘안산행 열차를 기다리다’(푸른사상)에는 지나온 삶의 이력과 일상에서 느낀 감성을 갈무리한 50여 편의 시가 수록돼 있다.

그는 “살다 보면 어찌할 수 없이 만나야만 하는 순간들이 분명히 찾아온다”며 “그러한 순간이 나에게 왔을 때 나는 어떤 모습으로 그 시간들을 마주할 것인가”라고 반문한다.

다양한 직업세계를 경험하는 동안 시인은 자본주의 속성과 인간에 대한 나름의 성찰을 터득했다. 사실 ‘영업’과 ‘시인’은 극과 극의 지점에 자리하는 존재다. 그러나 극과 극은 상통하기 마련인데, 한편으론 인간을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일말의 친연성을 지닌다.

박봉규 시인
“그늘 아래 진다 모든 그리움 저물어서/ 내 마음 단단한 덫에 걸린 고라니처럼 밤새 운다/ 바람에 젖는 갈대숲 내 울음 따라 같이 운다/(중략) 시절은 언제나 캄캄하고/ 눈먼 장님 바늘귀를 찾다 손가락을 찔리듯/ 열망은 자꾸만 내 발등을 찍는다/ 나는 나를 암매장하고 싶다/ 남몰래 내 범죄에 눌려 까무러치고 미열처럼 다가오는 신새벽…”

‘망명의 시절’이라는 시는 화자의 고단했던 청춘의 시간들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바람에 젖는 갈대숲”이 울음 따라 같이 울 만큼 슬픔과 상흔은 간단치 않다. 오죽하면 화자는 “나는 나를 암매장하고 싶다”고 선언했을까 싶다. “미열처럼 다가오는 신새벽”마다 홀로 깨어 애련한 청춘을 소환하는 화자는 오늘 삶이 버겁고 힘겨운 이들의 시간으로 확장되는 듯 하다.

고재종 시인은 “아직도 청년투의 발화나 호기를 씻어내지 못하였지만 그 호기가 오히려 삶에서나 시에서나 무한 긍정의 에너지로 작용할 수 있다”며 “이 시집이 그간 밀쳐두었던 시작의 출발점이 되어서 제2의 인생 고지에 치열하게 도전해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발문을 쓴 조성국 시인은 “시인이란 제 말길을 열어, 세상의 물길과 숨길과 은밀히 소통하는 자이므로 나는 그의 “희망”에 가만 귀 기울여 들을 수밖에 없다”고 평했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오피니언더보기

기사 목록

광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