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재능 - 유제관 편집담당1국장
2023년 10월 19일(목) 23:00
“골을 넣을 때 기분은 언제나 짜릿하다. 그런데 상대 공격을 막고 슈팅을 쳐냈을 때의 기분도 마찬가지더라.” 이탈리아 세리에A AC밀란의 공격수 올리비에 지루는 최근 새로운 재능을 발견했다. 리그 경기에서 팀의 골키퍼가 퇴장 당하자 골키퍼 장갑을 끼고 파상 공세를 온 몸으로 막아내 1대 0 승리를 지켰다. 지루는 짧지만 임팩트 강한 활약으로 세리에A 주간 베스트11에 공격수가 아닌 골키퍼로 이름을 올렸다.

지루의 변신은 1996년 광주 무등경기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해태와 삼성과의 경기에서 이종범의 활약을 떠올리게 한다. 홈런 2개를 포함해 5안타를 몰아친 이종범은 연장 10회 초 수비에서 유격수가 아닌 포수 마스크를 쓰고 나와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대타 활용으로 포수 자원을 모두 써버린 김응용 감독의 고육책이었다. 이종범은 총알 같은 송구로 2루 도루를 저지하고, 뛰어난 투수 리드와 안정적인 포구로 다시 한 번 야구 천재임을 증명했다.

그런데, 이종범이 포수 마스크를 썼을 때 가장 긴장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정답은 해태 선수들도, 코칭 스태프도, 팬들도 아닌 심판이었다. 마운드에 선 투수는 강속구와 다양한 변화구를 구사하는 이대진. 주심은 흙 묻은 홈 플레이트를 깨끗이 털어내고 나서 이종범을 불러 특별히 당부했다. “공 잘 잡아라. 네가 못 잡으면 그 공에 맞아 내가 죽는다.”

축구나 배구 선수들 중에는 포지션 변경을 통해 빛을 본 경우가 많다. 독일 축구의 전설 마테우스는 공격수에서 수비수로, 프랑스의 골잡이 앙리는 윙어에서 중앙 공격수로, 이탈리아의 마에스트로 피를로는 공격수에서 미드필더로 바꿔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국내 프로야구에서도 두산 감독 이승엽은 투수로 삼성에 입단했지만 타자로 전향해 ‘국민타자’가 됐고, 한화 문동주는 광주 진흥고 2학년 때 야수에서 투수로 보직을 바꿔 시속 160km의 강철 어깨를 유지할 수 있었다. KIA 최형우도 포수 마스크를 벗고 나서야 타격에 눈을 떴다고 한다. 막노동을 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야구에 대한 집념, 그리고 자기 안의 또 다른 재능을 키워 1500타점이라는 KBO리그 새 역사를 썼다.

/jkyou@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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