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은 배워서 가는 길이 아니다 - 김승일 조선대 음악과 명예교수
2023년 07월 19일(수) 00:00 가가
“나는 클래식 음악이 참 좋긴 한데 아는 게 있어야지? 그래서 그냥 담 쌓고 살아.” 클래식을 전공하다 보니 주변에서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옆에서 봐도 성향이나 기질이 참 감성적이어서 클래식에 쏘옥 젖어들 법도 한 사람인데 ‘도대체가 알 수 없더라’며 고개 절레절레한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클래식? 그걸 감상하는 데 아는 게 뭐가 필요해? 좋으면 들어 보고, 그렇게 들으면서 느끼면 되는 것 아닌가?”한다.
클래식이 좋긴 한데 알 수가 없다는 사람은 아마도 클래식을 들으며 만인이 명곡이라 일컫는 어떤 예술 작품의 메시지는 뭘까, 그 메시지를 알아 맞춰야 직성이 풀리는 형이지 않을까 싶다. 정답(작곡가의 메시지) 찾기 형인 이들에게 조수미가 부른 ‘그리운 금강산’은 ‘지금은 갈 수 없는 조국의 절경 금강산에 대한 그리움을 부른 노래’라는 게 답일 터이다.
그나마 이 경우는 가사가 있으니 자기 나름대로 정답을 찾을 수도 있다. 그런데 가사는커녕 제목도 없이 소나타 몇 번, 협주곡 몇 번 하는 그 음악, 그 클래식이라는 것의 메시지는 뭐란 말인가. 도통 알 수가 없으니 나는 음치이고 구제 불능이야 하고 체념해 버리는 건 아닐까.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따지지 마! 그냥 들어 봐, 들으면 돼, 듣다 보면 알게 돼”라고.
클래식 음악의 제목은 몰라도 어쩌다 큰 맘 한 번 먹고 들어 보면 가끔 맘에 쏙 드는 좋은 대목을 발견하기도 한다. 물론 전혀 느낌이 오지 않는 대목이 더 많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럴 때면 혼자 생각해 보게 된다. “나만 클래식을 들으며 이런 생각을 하나, 다른 사람은 이 대목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 걸까” 궁금증이 일어 한 번 더 음악을 들어보기도 하고, 귀찮고 어렵다며 음악과 담을 쌓고 지내기도 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만날 때 ‘우와~ 미녀다. 준수한 청년이야. 참 선하게 생겼다. 책임감 강하고 아주 훌륭하게 보이던데?’라는 평을 때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런데 그 정답 어떻게 알았을까? 어떻게 생기면 미녀이고 어떻게 생기면 준수한 청년이고 그 기준 누가 가르쳐 주었을까? 배운 바 없다. 그럼 타고 났더란 말인가? 그래서 다섯 살 때도 그렇게 알아볼 수 있었더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 아마도 나이가 들면서 비로소 조금씩 감이 잡히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다 사람을 선택해야 할 스무 살 때쯤 되니 나름대로 잣대가 생기고 보이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을 알아가게 되었듯이 음악의 아름다움도, 클래식 예술의 메시지도 그렇게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사도 없고 제목도 없고 소나타 몇 번, 협주곡 몇 번 하는 클래식 음악도 무조건 자주 듣고, 같은 곡을 반복해서 듣기도 하고, 음악회장을 찾아다니며 접하기도 하다 보면 체험의 누적이 쌓여가면서 잣대가 생기고 음악이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조금씩 천천히 알아가는 게 클래식의 길이다.
좀 더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클래식 강의를 들어보는 것도 좋다. 필자도 오랫동안 클래식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데, 초보 감상자들의 길라잡이 역할을 할 수 있어 조금은 뿌듯하다.
클래식 감상에 정답은 없다. 무조건 달려들어 귀로 들어 보고, 느낌으로 들어 가면서 시작해 볼 일이다. 그렇게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삶의 향기도 가꿔 보면 어떨까?
클래식이 좋긴 한데 알 수가 없다는 사람은 아마도 클래식을 들으며 만인이 명곡이라 일컫는 어떤 예술 작품의 메시지는 뭘까, 그 메시지를 알아 맞춰야 직성이 풀리는 형이지 않을까 싶다. 정답(작곡가의 메시지) 찾기 형인 이들에게 조수미가 부른 ‘그리운 금강산’은 ‘지금은 갈 수 없는 조국의 절경 금강산에 대한 그리움을 부른 노래’라는 게 답일 터이다.
클래식 음악의 제목은 몰라도 어쩌다 큰 맘 한 번 먹고 들어 보면 가끔 맘에 쏙 드는 좋은 대목을 발견하기도 한다. 물론 전혀 느낌이 오지 않는 대목이 더 많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럴 때면 혼자 생각해 보게 된다. “나만 클래식을 들으며 이런 생각을 하나, 다른 사람은 이 대목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 걸까” 궁금증이 일어 한 번 더 음악을 들어보기도 하고, 귀찮고 어렵다며 음악과 담을 쌓고 지내기도 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만날 때 ‘우와~ 미녀다. 준수한 청년이야. 참 선하게 생겼다. 책임감 강하고 아주 훌륭하게 보이던데?’라는 평을 때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런데 그 정답 어떻게 알았을까? 어떻게 생기면 미녀이고 어떻게 생기면 준수한 청년이고 그 기준 누가 가르쳐 주었을까? 배운 바 없다. 그럼 타고 났더란 말인가? 그래서 다섯 살 때도 그렇게 알아볼 수 있었더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 아마도 나이가 들면서 비로소 조금씩 감이 잡히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다 사람을 선택해야 할 스무 살 때쯤 되니 나름대로 잣대가 생기고 보이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을 알아가게 되었듯이 음악의 아름다움도, 클래식 예술의 메시지도 그렇게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사도 없고 제목도 없고 소나타 몇 번, 협주곡 몇 번 하는 클래식 음악도 무조건 자주 듣고, 같은 곡을 반복해서 듣기도 하고, 음악회장을 찾아다니며 접하기도 하다 보면 체험의 누적이 쌓여가면서 잣대가 생기고 음악이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조금씩 천천히 알아가는 게 클래식의 길이다.
좀 더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클래식 강의를 들어보는 것도 좋다. 필자도 오랫동안 클래식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데, 초보 감상자들의 길라잡이 역할을 할 수 있어 조금은 뿌듯하다.
클래식 감상에 정답은 없다. 무조건 달려들어 귀로 들어 보고, 느낌으로 들어 가면서 시작해 볼 일이다. 그렇게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삶의 향기도 가꿔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