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 멋진 만남 '노년의 일상' - 황태주 전남대의대 명예교수
2023년 07월 17일(월) 00:00 가가
‘자연 과학은 사회를 풍요롭게 하지만 인문학은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건전하게 사회를 이끌어 가는 힘이다’라는 말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의학이라는 학문은 넓게 생각하면 두 학문을 아우르는 통섭의 영역에 있지만 의사 생활을 하면서 항상 무언가 모자라는 갈증에 시달렸다. 퇴임 후 소위 노년이 되어 조금은 자유로워지면서 이런 갈증을 해결할 방안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여기저기 인문학 강좌를 찾아 기웃거리다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선배 철학 교수를 찾았는데 니체를 함께 공부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셨다. 그걸 계기로 고등학교 시절 심취했던 니체를 만났다. 노년이 되어 만난 초인.
노년이 되어 새로운 만남을 시작해도 되는 것일까? 언제까지 새로운 만남을 지속해도 좋을까? 사람들이 종종 말하듯이 시작이 바로 젊음일까? 많은 의문을 남기고 시작한 공부는 벌써 6년이 넘었고 나름 동료들과 새로운 독서회도 조직하여 유년 시절부터 읽었던 책들을 다시 섭렵하고 있다. 그 이름 ‘인문 둥지’다.
인문 둥지는 자기가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을 추천하여 돌아가면서 발표하고 토론도 한다. 모두 중년을 넘어선 나이라 살아온 날들도 반추한다. 때때로 숨어 있는 작가, 혹은 숨어 있는 책방을 찾아서 나들이도 간다. 섬진강변에는 낡은 책들이 숨어 있는 책방이 있다. 때로는 책갈피에 새겨진 글들이 가장 나답게 사는 길은 무엇이며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젊음은 곧 사라집니다, 당신은 노년기를 어떻게 준비하시겠습니까!”
어느 보험회사 광고 카피다. 우리나라 평균 수명이 증가하고 고령화 사회가 가속화됨에 따라 어디서나 노인 대책이 화두이고, 노인을 대상으로 한 상품 개발도 앞 다퉈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그 접근 방식이 우선 부정적이다. 과거에 노인은 “체력이 떨어지고 그래서 일을 할 수 없고, 쾌락을 즐길 수 없고, 죽음이 멀지 않았다”라는 부정적 고정 관념이 있다.
학자들은 사람이 100세까지 산다고 가정했을 때, 인간의 삶을 크게 4기로 분류하고 있다. 태어나서 대략 20세까지를 성장기, 20세부터 50세까지를 왕성한 사회 활동을 하는 시기, 50세부터 80세까지 장년기, 그리고 80세 이후를 쇠퇴기로 구분한다. 그런데 고령화 사회를 정의할 때, 대개 60세 이상 인구의 수가 얼마인가로 따지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역연령(calendar age)만으로 인간의 삶을 나눈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연령이 있다. 정신 연령, 감성 연령 등이 그것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만 죽는 것이 아니고 어느 때나 죽음이 찾아오듯이 반대로 정신 연령이나 감성 연령이 젊다면 그는 언제라도 맡은 바 임무를 능히 수행할 수 있고, 쾌락을 즐길 수 있고, 언제라도 낭만적일 수 있으며 죽음을 무시할 수 있다면 언제나 청년처럼 살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지금 나이가 장년기가 시작되는 50세라 할지라도 본인이 20세라 생각하고 대학에 입학해 학문에 정진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면 30여 년간을 활동해도 80세 밖에 되지 않는다. 실로 역연령으로 나눈 왕성한 사회 활동기를 다시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간에 축적한 원숙함과 신중함, 무엇보다 잘 훈련된 판단력에 의해 보다 더 적극적이고, 그리고 보다 사회에 유익한 일들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충분히 살았다고 생각한다면 죽음에도 초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우선 노년이 과거를 먹고 산다는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노년에도 미래 지향적으로 산다면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에 날아 오른다고 했다. 또 연극의 클라이맥스는 언제나 후반부에 있다. 멋진 클라이맥스를 장식하고 무대에서 물러날 수 있어야 인생이 아름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 같으면 언제 산으로 가도 아무도 서러워하지 않을 나이가 되었으니 언제 어디서 아무에게도 피해 주지 않고 멈출 것인지 걱정도 되지만 새로운 시작은 항상 가슴 뛰게 한다.
데드라인(Deadline)이라는 말이 있다. 신문사 기사 마감 시간으로 많이 쓰이는 말이지만 데드라인이 가까워지면 초조하다. 어느 것을 버리고 어느 것을 취할 것인지 막막할 때 더욱 초조해진다. 어디서 멈출 것인지가 중요하다.
어느 보험회사 광고 카피다. 우리나라 평균 수명이 증가하고 고령화 사회가 가속화됨에 따라 어디서나 노인 대책이 화두이고, 노인을 대상으로 한 상품 개발도 앞 다퉈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그 접근 방식이 우선 부정적이다. 과거에 노인은 “체력이 떨어지고 그래서 일을 할 수 없고, 쾌락을 즐길 수 없고, 죽음이 멀지 않았다”라는 부정적 고정 관념이 있다.
학자들은 사람이 100세까지 산다고 가정했을 때, 인간의 삶을 크게 4기로 분류하고 있다. 태어나서 대략 20세까지를 성장기, 20세부터 50세까지를 왕성한 사회 활동을 하는 시기, 50세부터 80세까지 장년기, 그리고 80세 이후를 쇠퇴기로 구분한다. 그런데 고령화 사회를 정의할 때, 대개 60세 이상 인구의 수가 얼마인가로 따지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역연령(calendar age)만으로 인간의 삶을 나눈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연령이 있다. 정신 연령, 감성 연령 등이 그것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만 죽는 것이 아니고 어느 때나 죽음이 찾아오듯이 반대로 정신 연령이나 감성 연령이 젊다면 그는 언제라도 맡은 바 임무를 능히 수행할 수 있고, 쾌락을 즐길 수 있고, 언제라도 낭만적일 수 있으며 죽음을 무시할 수 있다면 언제나 청년처럼 살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지금 나이가 장년기가 시작되는 50세라 할지라도 본인이 20세라 생각하고 대학에 입학해 학문에 정진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면 30여 년간을 활동해도 80세 밖에 되지 않는다. 실로 역연령으로 나눈 왕성한 사회 활동기를 다시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간에 축적한 원숙함과 신중함, 무엇보다 잘 훈련된 판단력에 의해 보다 더 적극적이고, 그리고 보다 사회에 유익한 일들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충분히 살았다고 생각한다면 죽음에도 초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우선 노년이 과거를 먹고 산다는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노년에도 미래 지향적으로 산다면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에 날아 오른다고 했다. 또 연극의 클라이맥스는 언제나 후반부에 있다. 멋진 클라이맥스를 장식하고 무대에서 물러날 수 있어야 인생이 아름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 같으면 언제 산으로 가도 아무도 서러워하지 않을 나이가 되었으니 언제 어디서 아무에게도 피해 주지 않고 멈출 것인지 걱정도 되지만 새로운 시작은 항상 가슴 뛰게 한다.
데드라인(Deadline)이라는 말이 있다. 신문사 기사 마감 시간으로 많이 쓰이는 말이지만 데드라인이 가까워지면 초조하다. 어느 것을 버리고 어느 것을 취할 것인지 막막할 때 더욱 초조해진다. 어디서 멈출 것인지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