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 살까, 누구와 살까-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2023년 04월 04일(화) 00:15 가가
“나 살아갈 곳, 어디를 택할까? 어진 사람들 있는 곳이 좋겠지. 난초 있는 방에선 향기 스미고 생선가게 있으면 악취 배는 법이니.” 목은 이색이 ‘이인위미’(里仁爲美)를 제목으로 지은 시의 첫 부분이다. 공자 이래로 유가 지식인들은 어디에 살 것인가를 어떤 이들과 함께할 것인가의 물음과 동일시해 왔다. “성인 공자도 마을 사람 잘 택하라 하셨고, 증자는 이문회우(以文會友)하여 인덕을 이루라 했네. 늙어갈수록 학문에 소홀함을 깨닫게 되니, 빈손으로 또 봄을 기다리는 게 부끄럽구나.” 퇴계 이황이 70세에 지은 시이다. 도산서당을 중심으로 제자들과 함께 읽고 토론하는 일을 무엇보다 즐긴 퇴계였지만, 좋은 이들과 함께 머물며 교유하는 것은 여전히 더 이루어가야 할, 진행형의 꿈이었다.
어디에 살지는 요즘 사람들에게도 지대한 관심사다. 하지만 그곳에서 누구와 함께 살지에 대해서는 그리 관심이 없어 보인다. 골목을 오가며 서로 잘 알고 지내던 마을의 개념은 사라지고, 같은 승강기를 이용하는 아파트 이웃과도 인사 나누기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1인 가구의 비율이 30%를 넘어선 마당에 다른 집 사람과의 소통이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여길 법하다. 혼자 방에만 있어도 세계 각지는 물론 상상의 공간까지 누비며 많은 이들을 만날 수 있는 인터넷 시대다. 굳이 성가시게 현실의 이웃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필자가 사는 ‘위스테이 별내’는 주택도시기금과 협동조합이 공동의 지분을 가지는 공공지원 민간 임대주택으로서, 입주민이 주체적으로 운영하는 새로운 형태의 아파트형 마을 공동체를 실험하고 있다. 2017년 협동조합 설립 후 2020년 입주에 이르기까지, 공간 설계부터 프로그램 수립 등의 과정을 조합원 참여로 진행했다. 동네 카페, 공유 주방을 비롯해 놀이방, 돌봄 센터, 책방, 체육관, 목공실, 스튜디오 등 일반 아파트에 비해 훨씬 많은 커뮤니티 시설이 조합원 투표를 통해 조성됐다.
이제 입주 3년차. 20여 개의 다양한 동아리와 10여 개의 자치위원회가 활동 중이고, 평생교육 플랫폼 ‘백 개의 학교’에서 서로 재능을 나누고 있으며, 아파트 내에 창출한 일자리가 40여 개에 이른다. 잔디 광장에서 동네 아이들의 축가와 함께 입주민 결혼식이 진행된 적도 있다. 함께 빚은 막걸리를 나누고 다양한 공동 구매가 이루어진다. 입주민끼리 눈만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한다. 어울려 노는 아이들 소리가 끊이지 않고, 엄마 아빠도 서로 알고 지내다 보니 잠시 외출하며 이웃집에 아이를 맡기는 일도 자연스럽다. 코로나19로 격리 생활을 해야 하는 집의 현관문에는 이웃들이 마련한 반찬과 먹거리가 연이어 걸린다. 마음 맞는 가족들은 서로의 집을 오가며 먹고 마시고 함께 여행도 다닌다. 491세대 모든 입주민이 한결같지는 않지만, 각자의 형편에 따라 꽤 많은 이들이 현실의 이웃을 만드는 일에 열심이다. 성가시기는커녕 매우 즐거운 마음으로.
아파트로는 첫 번째 시도였기에 적잖은 관심을 받아 왔고 꽤 긴 분량으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런데 의외로 부정적인 댓글도 제법 있었다. “기사만 읽어도 너무 피곤하다”는 반응부터 “지옥이다. 공짜로 살라 해도 안 갈 거다”는 극단적인 내용까지 있었다. 삶에 지치고 관계에 실망한 모든 이들에게 이런 공동체를 강요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원하는 이들이 협동조합으로 모여서 ‘느슨한 마을 공동체’를 꿈꾸며 살아가는 것은 대안적 시도의 하나로서 의미를 지닌다. ‘이인위미’니 ‘이문회우’니 하는 거창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이웃과 더불어 살 맛 나는 일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독특한 즐거움인지 다시 발견하고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다.
퇴계는 앞의 시를 음력 11월에 지었는데, 결국 기다리던 봄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하루가 다르게 여기저기 피어나는 꽃들처럼 새로운 봄이 또 기적처럼 찬란하게 우리 앞에 펼쳐지는 4월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봄이 영원히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어디에서 누구와 살 것인가를 곰곰이 다시 생각해 볼 때다. 우리에게 남은 봄이 다하기 전에.
아파트로는 첫 번째 시도였기에 적잖은 관심을 받아 왔고 꽤 긴 분량으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런데 의외로 부정적인 댓글도 제법 있었다. “기사만 읽어도 너무 피곤하다”는 반응부터 “지옥이다. 공짜로 살라 해도 안 갈 거다”는 극단적인 내용까지 있었다. 삶에 지치고 관계에 실망한 모든 이들에게 이런 공동체를 강요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원하는 이들이 협동조합으로 모여서 ‘느슨한 마을 공동체’를 꿈꾸며 살아가는 것은 대안적 시도의 하나로서 의미를 지닌다. ‘이인위미’니 ‘이문회우’니 하는 거창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이웃과 더불어 살 맛 나는 일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독특한 즐거움인지 다시 발견하고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다.
퇴계는 앞의 시를 음력 11월에 지었는데, 결국 기다리던 봄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하루가 다르게 여기저기 피어나는 꽃들처럼 새로운 봄이 또 기적처럼 찬란하게 우리 앞에 펼쳐지는 4월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봄이 영원히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어디에서 누구와 살 것인가를 곰곰이 다시 생각해 볼 때다. 우리에게 남은 봄이 다하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