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빨리 용서하지 마라- 장헌권 광주 서정교회 담임목사, 광주기독교회협의회 인권위원장
2023년 03월 14일(화) 22:00 가가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진압 작전이 시작되었다. 무수히 날아드는 총알을 피해 숨어 있던 필자의 선배 문용동은 헬기에서 들리는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는 소리를 들었다. 어느 정도 총소리가 멈추었기에 안심이 되어 문을 나가는 순간이다. 자동으로 쏘아 대는 총에 맞아 사망했다. 문용동 가슴에 조준 사격 세 발로 광주 민중항쟁 마지막 날 마지막 희생자가 되었다.
선배 문용동은 사람을 사랑하고 실천했던 신학도다. 그는 예수 정신으로 사랑과 용서를 설교했던 전도사이기도하다.
1980년 5월 광주시민을 군홧발로 짓밟았던 그 군홧발이 5월의 영령들이 누워 있는 곳으로 왔다. 그것도 기습적으로 참배를 했다. 일정을 변경하면서 참배를 한 것은 ‘도둑이 제 발 저리는’격이 아니고 무엇인가?
‘대한민국 특전사 동지회’는 1980년 5월 광주시민을 무참히 군홧발로 짓밟았던 3공수, 7공수, 11공수 등 특전사 예비역들의 단체다. 광주 학살을 통해 전두환 정권 장악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특전사 사령관 초대 회장이 바로 정호용이다.
더군다나 ‘용서와 화해’ 대국민 공동 선언문에서는 “당시 계엄군을 공적인 임무를 수행한 장병들로, 피해자로 바라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다. 기막힌 일이다. 가해자였던 계엄군을 피해자로 규정하고 있다.
공법단체인 5·18민주화운동 부상자회와, 5·18 민주화운동 공로자회 두 단체가 특전사 동지회가 합의한 행동강령에 계엄군의 행위에 대한 사과는커녕 반성도 없다. 가해자인 계엄군을 위로한다고 하는 것은 궤변이며 또 다른 5·18 역사 왜곡 담론이다.
광주에서 계엄군들이 저지른 학살과 폭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만행이다. 단순한 공적 임무 수행이라는 것은 당시에 현장을 목격했던 시민은 물론 43년이 지난 오늘 그것을 믿을 자는 아무도 없다.
광주 민중항쟁 43년 지난 오늘까지도 발포 명령을 누가 했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행방불명된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만삭된 임산부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총을 쏘았다. 심지어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서 헌혈을 하고 나오는 여고생에게 조준하여 총을 쏜 것이다. 이처럼 초·중학생에게도 무차별하게 총을 쏘고, 도망가는 고등학생의 뒷머리를 향해 조준 사격을 했다. 시위도 하지 않고 길 가던 시민을 무자비하게 폭행을 했다. 대검으로 찔렀다. 그래서 당시에 우리는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디 갔지”라고 물었다. 오월의 노래가 근거 없이 부른 노래가 아니다.
그동안 전두환 신군부 퇴진과 오월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피를 꽃잎처럼 뿌린 것을 역사는 알고 있다. 43년이 지난 지금도 5·18 희생자와 유가족, 부상자, 구속자는 물론 광주 시민들은 매년 5월이 되면 여전히 트라우마와 함께 가슴을 찢어내는 상처와 고통으로 살아가고 있다.
광주는 학살자들이 생존했을 때 단 한 번이라도 사죄를 하면 용서할 마음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사죄할 기회가 있었지만 시간을 낭비하고 영원히 광주 학살의 죄를 씻지 못하게 된 것이다.
지금이라도 가해자들의 진정성 있는 양심 고백과 처절한 성찰·참회·반성이 나오길 고대한다. 과연 문용동 선배를 비롯한 5월의 영령들이 ‘포용과 화해와 감사 대국민 공동선언식’을 기뻐할 것인가? 하늘에서 통곡할 것이다. 선배는 1980년 5월 27일 마지막 밤을 보내면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고백을 했다. 생명을 사랑하는 실천으로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순교한 것이다. 선배는 물론 오월의 꽃들이 “아직은 아니다.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현재 진행형이다. 어설픈 화해와 용서는 가짜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1980년 5월 광주시민을 군홧발로 짓밟았던 그 군홧발이 5월의 영령들이 누워 있는 곳으로 왔다. 그것도 기습적으로 참배를 했다. 일정을 변경하면서 참배를 한 것은 ‘도둑이 제 발 저리는’격이 아니고 무엇인가?
더군다나 ‘용서와 화해’ 대국민 공동 선언문에서는 “당시 계엄군을 공적인 임무를 수행한 장병들로, 피해자로 바라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다. 기막힌 일이다. 가해자였던 계엄군을 피해자로 규정하고 있다.
광주에서 계엄군들이 저지른 학살과 폭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만행이다. 단순한 공적 임무 수행이라는 것은 당시에 현장을 목격했던 시민은 물론 43년이 지난 오늘 그것을 믿을 자는 아무도 없다.
광주 민중항쟁 43년 지난 오늘까지도 발포 명령을 누가 했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행방불명된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만삭된 임산부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총을 쏘았다. 심지어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서 헌혈을 하고 나오는 여고생에게 조준하여 총을 쏜 것이다. 이처럼 초·중학생에게도 무차별하게 총을 쏘고, 도망가는 고등학생의 뒷머리를 향해 조준 사격을 했다. 시위도 하지 않고 길 가던 시민을 무자비하게 폭행을 했다. 대검으로 찔렀다. 그래서 당시에 우리는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디 갔지”라고 물었다. 오월의 노래가 근거 없이 부른 노래가 아니다.
그동안 전두환 신군부 퇴진과 오월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피를 꽃잎처럼 뿌린 것을 역사는 알고 있다. 43년이 지난 지금도 5·18 희생자와 유가족, 부상자, 구속자는 물론 광주 시민들은 매년 5월이 되면 여전히 트라우마와 함께 가슴을 찢어내는 상처와 고통으로 살아가고 있다.
광주는 학살자들이 생존했을 때 단 한 번이라도 사죄를 하면 용서할 마음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사죄할 기회가 있었지만 시간을 낭비하고 영원히 광주 학살의 죄를 씻지 못하게 된 것이다.
지금이라도 가해자들의 진정성 있는 양심 고백과 처절한 성찰·참회·반성이 나오길 고대한다. 과연 문용동 선배를 비롯한 5월의 영령들이 ‘포용과 화해와 감사 대국민 공동선언식’을 기뻐할 것인가? 하늘에서 통곡할 것이다. 선배는 1980년 5월 27일 마지막 밤을 보내면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고백을 했다. 생명을 사랑하는 실천으로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순교한 것이다. 선배는 물론 오월의 꽃들이 “아직은 아니다.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현재 진행형이다. 어설픈 화해와 용서는 가짜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