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가치가 주는 교훈- 황옥주 수필가
2023년 01월 20일(금) 00:30
숭어는 자라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다가 완전히 성장해야만 비로소 제 이름을 얻게 된다고 한다. 그 숭어가 일본말로는 토도(トド)다.

일본 다카마츠한국교육원에 근무하면서 ‘토도회’ 회원들과 친하게 지낼 때다. ‘숭어’를 친목회 명칭으로 삼은 것이 다소 의외였으나 아마 숭어가 그렇듯 주어진 환경에 슬기롭게 적응하며 최고를 지향하자는 취지 같았다.

어느 날, 아내와 함께 그들 야유회에 참석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부인이 심심할지 모르니 민단부인회 몇 사람과 함께라면 더욱 좋겠다는 배려도 있었다. 깊이 생각 않고 아내에게 그 말을 꺼냈다가 된통 퉁바리만 맞았다. 남자들 노는 자리에 여자들이 뭐 하러 가냐는 핀잔은 나를 완전히 골 빈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마침 가가와대학에 단감 연구차 오신 동아대학 농대 이명문 학장님을 청하여 같이 갔다.

일본인들 야유회는 노래도 없고 한국 사람이 즐기는 화투 놀이도 없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화투가 정작 일본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먹고 마시고 서분서분한 담소로 교유하는 것이 정형 틀이다.

화두가 결혼 풍습으로 옮겨지고 “한국에선 어떤 것을 최고의 결혼 선물이라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답이 궁했다. 자동차 키나 집문서 얘길 들은 적 있으나 그걸 결혼 선물이라기엔 마뜩찮고 더구나 축하객 선물로서는 당치가 않다.

보석 따위 이외는 떠오르지 않아 결국 일본의 경우를 물었더니 ‘카이로우 도우케츠’란 말을 들은 적이 있냐는 것이다. 고개를 갸우뚱하자 글씨로 보여준 게 바로 ‘偕老同穴’(해로동혈)이었다. 충분히 눈과 귀에 익혀진 말이다. 결혼 축사의 단골 덕담이 ‘백년해로’요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이었기 때문이다.

‘백년해로’는 추상명사다. 덕담이 결혼 선물이라? 그게 어떻게 최고 선물일 수 있느냐 했더니 바다 속 동물이라는 말에 사고의 샘이 말라 버렸다. 무식한 소이로 백년해로에 다른 뜻이 있는 줄 몰랐다.

‘부부가 살아서는 함께 늙고, 죽어서는 같은 무덤에 묻힘’의 풀이는 누구나 다 안다. ‘바다수세미’를 일컫는다는 두 번째 풀이는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완전 생경스러운 단어다. 수세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 바다수세미라면 바다 속에서 자란 어떤 해조류려니 오해할 만하다. 그런데 식물이 아니고 동물이라는 설명에는 손을 들고 말았다.

다시 국어사전에서 바다수세미를 찾아봤다. ‘육방해면 동물로 몸은 수세미와 비슷한 둥근 통 모양으로 길이는 11센티에서 36센티, 폭 2~6센티로 체벽(體壁)에 지름 2미리 가량의 구멍이….’ 대한해협이나 일본 근해의 깊은 바다 속에 살고 있다 했다.

이 해면동물은 꼭 식물 수세미처럼 온 몸 체벽에 격자 모양의 구멍이 통로를 이루고 있어 그곳을 통해 어린 바다새우가 드나든단다. 새우는 적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을뿐더러 애써 먹이를 찾아다닐 필요 없이 격자 통로로 들어오는 작은 뜬 사리 같은 미생물을 먹고 산다는 설명이다.

바다수세미는 조류를 따라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므로 격자 속의 새우는 자연스럽게 무료 유람선을 타고 세계를 주류하게 된다. 새우가 탈피를 거듭해 체형이 커지면 좁은 격자문을 드나들 수가 없게 되고 그 후부터 암수새우는 바다수세미 안에서 공생한다. 그러다 바다수세미가 죽으면 그들 생도 끝난다. 진짜로 완벽한 해로동혈이다.

일본은 섬나라다. 어쩌다 어민들 그물에 걸려 올라 온 바다수세미가 신기하기도 했으리라. 이를 말려 결혼 기념물로 선사한다니 재미있는 풍습이다. 그러나 생각해 볼 여지는 있다. 바다수세미의 죽음은 곧 새우 부부의 억지 죽음이다. 황혼 이혼의 아픔은 겪지 않아 좋을지 몰라도 늙어서 맞게 될 자연사도 서러운데 남의 죽음이 내 죽음이라니.

해로동혈! 바다수세미! 글자로는 동물일 수 없는 이름이다. 그 얘기 들은 지 40년인데 아직까지 본 적이 없어 동화를 들은 기분이다. 사물의 가치는 귀할수록 높다. 생명체가 공생공사한다는 것은 대단한 인연임에는 틀림없다.

뜻 새김은 사람마다 다르다. 억지 죽음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해로동혈이 결혼 선물로서는 좀 그렇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죽음을 내 의지로 결정할 수는 없지만 남의 죽음에 따라 나도 죽어야 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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