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그레시브한 2023년’이 무슨 뜻일까- 박진영 공감커뮤니케이션연구소 대표
2023년 01월 16일(월) 00:15
1989년 2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공항에 착륙하던 한 항공기의 조종사가 관제탑에서 2400ft로 하강(“descend two four zero”)하라고 지시한 것을 400ft로 하강(“descend to four zero”)하라는 것으로 잘못 알아들었다. 치명적인 충돌 사고를 일으켰다.

항공 운수에서는 영어가 국제 공용어다. 하늘에서 마주친 비행기 조종사들이 공용어를 쓰지 않고 자기 나라 말로 전했다가 알아듣지 못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은 소통에 쓰이는 도구다. 제대로 소통하고 싶다면 상대가 오해하지 않게 정확하게 내 뜻을 전달해야 한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영어 연설을 유창하게 할 만큼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다. 미국에서 석박사를 했고, 통상교섭본부장을 맡는 등 통상외교 분야에서 오래 일해서 그럴 것이다. 지금도 영어로 대화하는 사람을 자주 만날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영어를 잘한다고 우리 국민에게 전하는 말까지 영어로 해야 할까? 이런 어리석은 질문을 해 보는 것은 그의 말에 영어가 너무도 많이 섞여 있어서다. 잠시 기자들과 나눈 대화를 들어보자.

“디지털(Digital) 트랜스포메이션 커넥티드(Transformation Connected)와 연계해서 인클루시브(Inclusive)하게 방향을 터닝(Turning)하고 있어서 시리어스(Serious)한 논의도 별로 못했어요. 지금까지 어프로치(Approach)가 저는 좀 마일드(Mild)한 것 같아요.”

“프루덴셜 레귤레이션(Prudential Regulation)이라는 것은 굉장히 시스테머티컬리(Systematically) 연결이 돼 있는 분야가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Global Supply Chain)의 디스럽션(Disruption)의 문제가 이런 것들이 일어나는.”

지난해 11월 15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나온 발언이다. 사적인 자리가 아니다. 그는 어떤 이유로 이렇게 과감하게 영어를 섞어쓰는 것일까? 그렇게 말해야 기자들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영어를 남발한 것일까? 아닐 것이다. 늘 우리말로 소통하는 기자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어 보인다. 간담회 내용은 방송국에서 영상 뉴스로 시청자에게 전할 것이다. 이럴 때를 생각하면 국민에 대한 배려도 전혀 없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이 잘 이뤄지려면 듣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상대가 잘 알아듣도록 쉬운 말을 써야 한다. 텔레비전 뉴스를 보던 88살의 어머니는 “저 사람, 한국 사람 아니냐?”고 내게 물으셨다.

병원을 배경으로 한 의학 드라마를 보면 의사들끼리 이야기하면서 영어로 된 전문 용어를 수도 없이 남발하는 것을 흔히 들을 수 있다. 병원에 환자로 갔다가 그런 대화를 옆에서 들으면 썩 즐겁지 않다. 그러나 의사도 환자에게 설명할 때는 환자가 알아듣기 어려운 전문 용어를 쓰지 않는다.

말을 할 때 영어를 자주 섞어 쓰는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자신을 드러내는 콘텐츠가 빈약할 때 영어로 말하면서 특별함을 보여주고 싶은 심리다.

다른 하나는 무언가를 논리적이면서 유려하게 설명할 수 없을 때 그것을 포장하고자 영어를 사용하는 경우다. “거번먼트 인게이지먼트가 바로 레귤레이션이다” “2023년에는 더 아주 어그레시브하게 뛰어봅시다”와 같은 말은 무슨 뜻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다.

사람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하고 싶은 말을 문장으로 제대로 구성하지 못하고, 제대로 뜻을 전달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무지를 감추고 싶은 마음에 영어 단어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

제대로 소통하려면 내가 한 말을 상대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미리 파악하고, 상대가 잘 알아듣도록 말해야 한다. 공인의 언어는 더욱 그래야 한다. 여전히 영어를 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을 보면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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