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을 심는 손길- 정범종 작가
2023년 01월 11일(수) 00:45
손이 활기차야 한다. 특히 작가는. 마르케스는 손이 따뜻할 때 글을 쓴다고 했다. ‘백 년의 고독’을 이기기 위해서는 따뜻한 손이 필요했으리라. 하지만 돈이 환경을 파괴하고 생명을 몰살시키는 자본세(資本世)에서는 활기찬 손이 필요하다. 풀포기 하나라도 살려 내는 글을 쓰려면 더욱더 그렇다.

나는 손이 활기차지도록 추자를 손에 쥐고 주무른다. 손안이 지압이 되면서 손이 활기차진다. 머리가 맑아지는 건 덤이다. 추자는 가래나무 열매이다. 이것에 낯선 이들은 토종 호두쯤으로 이해하면 된다.

나는 광주 북구 운암동에서 사는데 추자를 얻는 곳은 광주천 둔치이다. 운암동의 광주천 둔치에 가면 물가를 따라 가래나무들이 열 그루 가까이 서 있다. 이 나무들은 사람이 심은 게 아니다. 추자는 물에 흘러가다가 물가에서 싹을 틔운다. 그러니까 운암동의 광주천 둔치 가래나무는 무등산에서 내려온 씨앗이 싹 터서 자란 나무들이다.

손안에다 쥐고 주무르기에 호두는 두 알이 적당하지만 추자는 작아서 세 알이 그러하다. 세 알을 주무르면 호두 두 알보다는 더 부드러운 소리가 난다. 호두가 내는 건 여름 들판의 개구리 소리라는데, 추자가 내는 건 여름 강의 여울목 소리 같다.

광주천 둔치에서 가을에 내가 얻는 추자는 수백 개에 이른다. 나는 이걸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서울의 지인들에게도 보낸다. 광주천 둔치에서 나온 거라는 설명과 함께 손을 활기차게 만드는 데 쓰고 내년 봄에는 땅에다 심으라고 부탁한다.

추자를 여기저기에다 나눠주고 나면 겨울이 온다. 나는 손안에다 추자를 굴리면서 광주천 둔치로 산책하러 나간다.

광주천이 광주 북구 운암동을 지날 때는 동에서 서로 흐른다. 냇물의 폭은 수십 미터에 불과하지만 양쪽의 둔치까지 합치면 이백 미터 가까이 된다. 동에서 서로 흐르고 그 폭이 이백 미터가 된다는 점에서 파리의 센강과 닮았다.

파리는 별칭이 빛의 도시여서 광주의 별칭인 빛고을과 비슷하다. 인권, 그 가운데서도 특히 자유를 위해 시민들이 분투해 왔다는 점에서도 역시나 광주와 비슷하고. 그래서인지 나는 파리에서 플라타너스를 만났을 때는 전남대와 조선대 교정의 플라타너스를 떠올렸다. 광주에서 마로니에를 만나면 뤽상부르공원과 센강 유역의 마로니에를 떠올리고.

광주에는 곳곳에 마로니에가 있지만, 내가 자주 만나는 마로니에는 광주문화예술회관의 등나무 쉼터 옆에 있는 세 그루이다. 광주문화예술회관이 만들어질 당시 심어진 이 나무들은 광주에서 오래된 마로니에에 든다.

작년 가을에 나는 이 세 그루 마로니에 나무들 아래서 열매를 주웠다. 마로니에 열매는 호두처럼 겉껍질이 있고 그 안에 씨앗이 들어 있다.

마로니에 씨앗을 살펴보는 내게 어떤 아주머니가 다가와서 물었다. “이거 먹어도 돼요?” 아주머니가 내민 비닐봉지에는 마로니에 열매가 그득했다.

“아주머니, 이건 마로니에 열매인데 독이 들어 있어요. 그런데 파리로 가져가면 독이 없어져요. 이걸 꼭 드시고 싶으면 파리로 가져가세요.”

내가 먹지 못한다고 에둘러 말했다는 걸 알았는지 아주머니는 비닐봉지에 든 마로니에 열매를 쏟아버렸다. 나는 그걸 주워 놓았다가 빈터에다 심었다.

‘씨앗은 심어야 한다.’ 이걸 나는 할머니한테 배웠다. 할머니는 시골에서 살 때는 텃밭을 가꾸셨는데 일 년 내내 풍성했다. 상추, 배추, 아욱, 무, 고추, 유채, 당근……. 도시에서 살 때는 내버려진 빈터에다 호박이며 들깨를 심었다.

나 역시 집 근처에서 빈터를 만나면 씨앗을 심는다. 이런 나를 보고 어떤 작가들은 그런 짓은 그만두고 여행을 가자고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면서 미리 여행지를 알아 두어야 한다는 말도 덧붙인다.

세상에는 많이 알아서 많이 본다는 이들은 흔하다. 하지만 보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이 도시를 조금이라도 더 활기차고 아름답게 가꾸려면 꽃씨를 심어야 하는 것이다. 새해에도 나는 할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계속 씨앗을 심을 참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떠드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행한 만큼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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