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새를 찾아서 -김목 광주·전남아동문학인회장
2023년 01월 09일(월) 00:15 가가
신께 소원을 빌었는데, 그 소원에 대한 신의 대답을 누가 들었을까? 사실 신의 침묵은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어서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태어날 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그 대답을 미리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이 우리에게 준 답은 과연 무엇일까?
흔히 희망의 상징으로 파랑새를 든다. 벨기에 작가 ‘마테를링크’가 쓴 동화에서 ‘파랑새’는 희망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동화에서 유래한 ‘파랑새 증후군’이란 심리학 용어는 헛된 희망에 사로잡힌 증세이다.
파랑새는 5월경에 우리나라에 오는 여름 철새이나, 쉽게 볼 수 있는 새는 아니다. 중국 신화의 파랑새는 서왕모를 모시는 신조이며 삼보조이고 일본은 불법승이라 했다.
우리나라의 파랑새는 슬픔과 한을 품고 있다. ‘파랑새야 파랑새야/ 내 콩밭의 파랑새야./ 어이해 다시 날아들어 구름 위로 가버렸니?/ 왔거든 모름지기 가지를 말지/ 또 갈 걸 어이해 찾아왔더냐.’는 1989년에 발굴된 ‘화랑세기’의 ‘청조가’로 사다함의 애달픈 사랑 노래이다.
왕자의 부인으로 출궁된 아름다운 여인 미실과 우두머리 화랑 풍월주 사다함은 서로 사랑했다. 그러던 중 사다함이 전쟁터에 다녀오니 미실은 다시 궁궐에 있었고 사다함은 이루지 못한 사랑의 상처를 안고 17세에 죽는다. 그 뒤 사다함의 ‘청조’였던 미실이 천주사에서 사다함의 명복을 빌었는데 그날 밤 꿈에 미실의 품에 사다함이 뛰어들었다. 임신을 한 미실은 아들 ‘하종공’을 낳았는데, 사다함과 비슷했다는 화랑세기의 기록이다.
전봉준을 노래한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도 역시 이루지 못한 꿈과 민중의 애환이 서려 있다. 여기 파랑새는 녹두꽃을 헤치고 희망을 짓밟는다. 녹두는 전봉준이요, 녹두밭은 농민군이며, 청포장수는 민중이기 때문이다.
또 ‘새야 새야 파랑새야/ 전주고부 녹두새야/ 어서 빨리 날아가라/ 댓잎 솔잎 푸르다고/ 봄철인줄 알지 마라/ 백설 분분 흩날리면/ 먹을 것이 없어진다’도 있다. 여기 파랑새는 곧 팔왕새로 팔왕(八王)은 전봉준 전(全)자의 파자이니, 파랑새는 원통하게 죽은 전봉준이다.
조선시대의 소설 ‘숙영낭자전’의 파랑새는 한을 풀어주는 대행자 역이다. 선군의 아내인 숙영은 선군이 과거를 보러 간 사이에 시부모의 학대와 모함으로 자결한다. 선군이 돌아와 숙영의 가슴에 꽂힌 칼을 뽑자 그 자리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나왔다. 선군은 파랑새의 도움으로 숙영의 한을 풀고, 되살아난 숙영과 행복하게 산다.
매월당 김시습도 ‘문청조성유감(聞靑鳥聲有感)’이란 시를 남겼다. 파랑새 울음소리에 잠이 깬 김시습은 파랑새에게 삼천 년을 살며 신선처럼 살 수 있는 복숭아 한 개를 가져오라고 했다. 파랑새는 허공으로 훨훨 날아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선도 복숭아를 가져다 주지 않았다.
한하운(1920~1975) 시인은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라고 토로했다. 뙤약볕 내리쬐는 남도 황톳길을 걸어 소록도로 가던 한센병 시인에게 파랑새는 슬픈 삶의 종착점이자, 한 맺힌 삶의 몸부림이었다.
파랑새는 남의 둥지를 차지하기 위해 격렬하게 싸운다.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도 전투적이다. 그게 곧 동물들의 원초적 본능이고 모습이다. 희망이나 행복, 자유, 평화 등은 그저 우리들의 관념일 뿐이다. 막연히 기대어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 스스로 얻어야 한다.
아름다운 여름 철새로 ‘캑캑캑, 캐 옛, 캐에캐켓’하고 시끄럽게 우는 파랑새는 활엽수 우거진 인가의 농경지 부근, 큰 고목이 드문드문한 침엽수림에 구멍을 뚫어 보금자리를 튼다. 나무 꼭대기쯤에 앉아 있다가 딱정벌레, 매미, 나비 등 날 곤충을 잡아먹는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호락호락 보여 주지 않는다. 창가에 새장을 걸고 키우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무튼, 신이 우리의 기도에 대답하지 않는 것은 그 답을 모두에게 공평하게 미리 주었음이다. 무슨 답을 따로 더 얻겠는가? 따라서 신의 침묵은 바로 희망이다.
파랑새는 5월경에 우리나라에 오는 여름 철새이나, 쉽게 볼 수 있는 새는 아니다. 중국 신화의 파랑새는 서왕모를 모시는 신조이며 삼보조이고 일본은 불법승이라 했다.
우리나라의 파랑새는 슬픔과 한을 품고 있다. ‘파랑새야 파랑새야/ 내 콩밭의 파랑새야./ 어이해 다시 날아들어 구름 위로 가버렸니?/ 왔거든 모름지기 가지를 말지/ 또 갈 걸 어이해 찾아왔더냐.’는 1989년에 발굴된 ‘화랑세기’의 ‘청조가’로 사다함의 애달픈 사랑 노래이다.
또 ‘새야 새야 파랑새야/ 전주고부 녹두새야/ 어서 빨리 날아가라/ 댓잎 솔잎 푸르다고/ 봄철인줄 알지 마라/ 백설 분분 흩날리면/ 먹을 것이 없어진다’도 있다. 여기 파랑새는 곧 팔왕새로 팔왕(八王)은 전봉준 전(全)자의 파자이니, 파랑새는 원통하게 죽은 전봉준이다.
조선시대의 소설 ‘숙영낭자전’의 파랑새는 한을 풀어주는 대행자 역이다. 선군의 아내인 숙영은 선군이 과거를 보러 간 사이에 시부모의 학대와 모함으로 자결한다. 선군이 돌아와 숙영의 가슴에 꽂힌 칼을 뽑자 그 자리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나왔다. 선군은 파랑새의 도움으로 숙영의 한을 풀고, 되살아난 숙영과 행복하게 산다.
매월당 김시습도 ‘문청조성유감(聞靑鳥聲有感)’이란 시를 남겼다. 파랑새 울음소리에 잠이 깬 김시습은 파랑새에게 삼천 년을 살며 신선처럼 살 수 있는 복숭아 한 개를 가져오라고 했다. 파랑새는 허공으로 훨훨 날아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선도 복숭아를 가져다 주지 않았다.
한하운(1920~1975) 시인은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라고 토로했다. 뙤약볕 내리쬐는 남도 황톳길을 걸어 소록도로 가던 한센병 시인에게 파랑새는 슬픈 삶의 종착점이자, 한 맺힌 삶의 몸부림이었다.
파랑새는 남의 둥지를 차지하기 위해 격렬하게 싸운다.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도 전투적이다. 그게 곧 동물들의 원초적 본능이고 모습이다. 희망이나 행복, 자유, 평화 등은 그저 우리들의 관념일 뿐이다. 막연히 기대어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 스스로 얻어야 한다.
아름다운 여름 철새로 ‘캑캑캑, 캐 옛, 캐에캐켓’하고 시끄럽게 우는 파랑새는 활엽수 우거진 인가의 농경지 부근, 큰 고목이 드문드문한 침엽수림에 구멍을 뚫어 보금자리를 튼다. 나무 꼭대기쯤에 앉아 있다가 딱정벌레, 매미, 나비 등 날 곤충을 잡아먹는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호락호락 보여 주지 않는다. 창가에 새장을 걸고 키우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무튼, 신이 우리의 기도에 대답하지 않는 것은 그 답을 모두에게 공평하게 미리 주었음이다. 무슨 답을 따로 더 얻겠는가? 따라서 신의 침묵은 바로 희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