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다정(多情)- 곽성구 전 광주일고 교사
2023년 01월 02일(월) 23:00
얼마 전 오랜만에 눈이 많이 쌓였다. 아직 강아지인 나도 손주들도 신이 났다.

해마다 홍수로 한바탕 물난리를 겪어야 여름이 지나가곤 했다. 한데 올해는 그런 기억이 없어서 여름이 참 이쁘게 지나가는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저수지에 넘칠 듯 가득하여야 물을 필요한 곳에 보내 주고 우리의 생활용수로 활용되는 모양이다. 비가 어서 오기를 기다렸다. 광주·전남 지역 상수원들이 바닥을 드러내 제한 급수를 해야 할 상황까지 왔으니 기우제라도 지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긴박감까지 들었다.

겨울비가 흡족히 내려 해갈을 바라기도 하지만 겨울비라는 것이 어디 쉽게 내리던가? 우리는 급하게 비가 필요하지만 하늘의 뜻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3월이면 제한 급수를 한다 하니 급하다.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닐지니 겨울비가 절실하다.

일기예보를 예민하게 관찰하여도 비는 기대할 수 없고 눈이라도 많이 내려 제한 급수까지는 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느님은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도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 반가운 눈이 왔다. 그것도 폭설이란다. 광주·전남에만 유독 많이 내렸다. 폭설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불편하게 하여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우선 우리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눈 내리는 밖을 보면서 ‘조그만 산길에 흰 눈이 곱게 쌓이면 내 작은 발자욱을 영원히 남기고 싶소’를 정겹게 부르는 조수미의 음성을 따라 눈을 감으니 내 상념은 깊어만 갔다. 상상은 내 마음 어디로 달려가는 지 알 수 없는 곳까지 데려다 주었다. 요즘 아내는 이런 나를 보고 베짱이라고 놀려 먹는다. 참 이상하다. 요즘은 나를 바보라 해도 화가 나지 않는다. 아니 내지 못한다. 사실이니까. 베짱이라 놀려 먹어도 별로 화가 나지 않는다. 이건 내가 나이를 먹어서일까 수양이 깊어진 덕분일까.

분분히 날리는 눈송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 마음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아주 짧은 시간의 생각들은 여러 장면을 연출한다. 어디서 이런 생각들이 눈송이 속에 들어 있었을까. 어릴 적 뛰놀던 고향집으로 데려다 준 눈송이는 게으른 베짱이에게 붓을 들게 한다.

고적(高適)의 ‘제야작’(除夜作)이라는 한시 구절을 휘호해 보았다. “고향금야사일천(故鄕今夜思一千) 상빈명조우일년(霜빈明朝又一年)”(고향에서는 오늘 밤 멀리 떠난 나를 생각하고, 백발은 내일 아침이면 또 일 년을 보내는구나)

고향에서 나를 기다리는 부모 형제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부질없는 내 백발은 또 이렇게 일 년을 보낸다. 화선지 위에 여러 생각들이 날아다닌다. 이제 부모님은 우리 곁을 떠나고 고향집에는 낯선 젊은이들이 살고 있지만, 지금도 고향집은 늘 꿈속에서 나를 반긴다.

왕유(王維)의 한시 한 구절도 떠오른다. 고향집에 대한 상념이다. “내일기창전(來日綺窓前) 한매저화미(寒梅著花未)”(오실 때 비단 창문 앞에 한매 몇 송이 피었던가요)

고향집 앞 정겨운 매화를 늘 그리워하는 마음이 이렇게 깊어진다. 폭설이지만 기다리던 눈이다. 휘날리는 눈송이 속에 베짱이는 게으름 더하며 달려 간다. 이제 저수지에 물도 더해지고 나의 작은 배짱은 크게 두둑해져 ‘배짱이’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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