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된 공감과 자기부정의 위험한 관계-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2022년 11월 28일(월) 01:00
공감은 사람에게 있는 가장 탁월한 능력에 속한다는 것을 의심할 이유는 별로 없다. 공감은 모든 관계에서 그리고 윤리적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갈등과 단절을 해결하는 조건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는 말은 대부분 모욕과 비난으로 들린다. 타인을 정서적·감정적으로 이해하거나 인지하는 데에 심각한 장애나 결핍이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공감하는 능력을 마냥 긍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공감 그 자체에 대한 부정이나 거부가 아니고, 과잉된 공감의 위험 때문이다. 어떻게 왜, 공감하는가를 묻지 않는 무조건적인 공감의 과잉과 그 방식의 문제다. 이러한 공감 관계 속에서 어느 덧 ‘나’는 사라지고 공감의 감정만 남을 때, 맹목적이며 파괴적인 공감의 조건이 형성된다. 독일 학자 브라이트하우프트에 의하면 “공감은 자아 상실로 이어질 수 있으며, 흑백 사고 또는 ‘친구 아니면 적’이라는 식의 사고방식을 보인다.” 누군가에 대한 맹목적이고 추종적 공감 관계에서는 세상 사람은 ‘우리’이거나 ‘적’이다.

이렇게 한쪽에 대한 공감의 과잉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적’에 대한 비인간적인 수단과 행위는 내부적인 정당성을 얻는다. 특히 가장 위험한 공감 감정은 구체적 위력을 가진 특정 대상에 대한 동일시의 공감이다. 이러한 공감은 맹목적으로 절대성역과 신격화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한 대상이 신격화되는 순간부터 요구되는 것은 오직 추종과 복종 뿐이다. 추종자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오히려 집단의 선(善)을 위배하고 악(惡)의 편에 서는 것임을 먼저 학습한다. 이렇게 해서 추종자들은 쉽게 신격화된 대상을 위한 수단이 되기를 자처한다.

불과 몇 달 전의 사건이다. 인도 출신의 영국 작가 살만 루슈디(1947~)가 2022년 8월 12일에 뉴욕의 한 행사 참석하는 도중에 한 청년으로부터 매우 잔인한 공격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작가는 1988년에 ‘악마의 시’라는 작품을 발표한 후 10년을 공개적인 살해 협박에 시달렸다. 당시의 이란 통치자 호메이니가 1989년에 사형을 선고하고 살해를 지시하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일부 무슬림들은 이슬람 종교 관련 부적절한 내용이 포함되었다는 이유로 분노를 넘어 심지어 폭동도 불사한 것이다. 불가침의 신성에 대한 작가의 ‘불경함’에 대해서 사실상 살해 지시가 내려지고, 현상금이 걸렸으며, 작품의 번역자가 실제로 살해를 당하기까지 했다. 절대적 권력자 호메이니의 사후에야 사형 선고가 공식적으로 철회되었고 작가는 비로소 대외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사실 소설은 영국의 인도 이민자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인도인들이 이민 와서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겪는 혼란을 풍자적으로 묘사하며, 동시에 영국인들이 낯선 이민자들과 겪는 갈등을 다룬다. 그런데 작가는 인도 이민자들처럼 초기 이슬람교에서도 기존 아랍인들과 갈등을 겪었고, 이슬람 이전의 신앙을 일부 수용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바로 이 지점이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에 대한 불경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말처럼 협박과 증오를 퍼붓는 사람들 중 과연 몇이나 제대로 작품을 읽었을지는 지극히 의문이다. 지금 작가는 한쪽 눈을 실명하고 손 하나를 쓸 수 없게 되었다.

루슈디의 그 ‘불경’한 작품이 세상에 나온 지 무려 34년이 지난 뒤, 미국에 사는 24살 청년은 무엇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이 작가를 살해하려 한 것인가. 지독한 맹신은 우선 맹목적 공감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자신의 믿음에 공감하지 않는 자는 ‘신성을 모독한 자’이다. 그리고 편향된 공감과 확신은 다른 쪽에 대한 합리적 인지와 이성의 힘을 통한 감정 표현의 길을 봉쇄한다. 여기에 과잉된 공감의 독이 깊게 스며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루슈디를 지지하며 집회에 나섰다. 이는 작가 한 사람에 대한 것만이 아니고 표현의 자유가 의미하는 가치와 권리에 대한 공감 표현이다. 누가 감히 세상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눈과 입을 가릴 수 있으며, 굴종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건강한 공감을 막을 수 있겠는가. 문제는 공감의 외눈박이가 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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