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희망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2022년 10월 31일(월) 01:00 가가
때로는 누군가의 말 한 마디가, 표현 하나가 마음에 파동을 일으킨다. 그런 표현 중 하나가 ‘희망’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표현들을 듣는 일이 갈수록 줄어들어서 어쩌다 듣게 되면 오히려 낯설고 그 의도를 따지게 된다. 마치 사라져가는 희귀 동물의 이름처럼 듣기도 말하기도 어려운 표현이 되었다. 희망이라는 누구나 알고 있는 쉬운 단어가 낯설게 들리는 것은 어쩌면 더 나아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귀를 열기에는 우리의 마음이 차겁게 얼어붙은 탓인가 싶다. 그러나 희망은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사라지거나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삶을 지탱하는 하나의 원리라고 말하는 사상가가 있다. 에른스트 블로흐라는 독일 철학자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1885년 독일 남서쪽에서 유대인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서 평생 고통과 차별 속에서 살았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1918년 스위스 망명을 비롯하여 1933년부터는 나치를 피해 세계를 떠돌아 다녔다. 다시 독일로 돌아와서 당시 나눠졌던 두 개의 독일 중 블로흐는 동독을 선택했다. 모두가 함께 잘살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블로흐는 얼마 안 가서 이념적 이유로 정부와 끊임없이 갈등을 겪었다. 결국 서독을 여행하던 중 1961년 동독으로 돌아가는 대신에 서독에 정착하여서 튀빙겐에서 1977년에 생을 마감했다. 오딧세이의 삶을 산 블로흐는 자신의 사상을 10년이라는 긴 세월의 작업 끝에 완성한 방대한 저작 ‘희망의 원리’에 집약하였다. 워낙 방대한 책이어서 읽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희망의 원리라는 이 제목에서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을 느낀다.
블로흐가 말하는 희망은 마냥 바라고 있는 것, 혹은 무조건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요행을 바라고 초월적 힘에 기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가 말하는 희망은 부단히 배워야 하는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정언명령으로서의 희망이다. 우리가 진심으로 희망한다면 어떻게 무엇을 희망해야 하는 것인가를 배우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는 희망할 수 있을 만한 이유가 없기에 오히려 희망을 배워야 한다고 단호하고 말한다. “토대는 흔들리고, 그들은 왜 그리고 무엇에 의해서 혼란을 느끼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심적 상태는 두려움이며, 그것은 분명해질수록 공포의 모습으로 우리를 엄습한다.……문제는 희망을 배우는 일이다.” 혼란과 두려움과 공포가 우리를 지배하며 엄습하기 때문에 희망을 배워야 한다고 것이다.
희망이란 ‘보다 나은 가능한 삶’을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은 현실과 동떨어진 막연한 초월적 낙관이 아니기에 변화를 위한 희망은 그 변화가 필요한 현실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희망은 언제나 현실에서 싹터야 하고 다시 현실에 뿌리내려야 한다. 그래서 “세상에 도움을 주는 무엇을 세상 속에서 발견해 낸다”는 희망의 원리가 필요하다. 우리가 겪는 불안은 특히 자신의 삶이 방향을 잃었다고 생각될 때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된다. 그리고 불안에 대한 두려움과 좌절감으로 인해서 흔히 그리고 쉽게 나타나는 태도가 거친 냉소와 무조건적 불신이다. 하지만 세상을 냉소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대상은 정작 타인이 아니고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신에 대한 불신과 부정의 눈길을 세상의 문제에서 생기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냉소주의의 바탕에서 작동하는 마음에는 무엇보다도 자기혐오와 열등감, 무력감의 얼음덩이들로 가득하다.
희망을 배우는 것이라고 하는 의미는 희망한다는 것이 곧 저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현실에 맹목적으로 순응하지 않는다. 블로흐의 현실은 어느 때도 순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그래서 블로흐는 ‘희망의 내용은 변할 수 있지만 희망의 동인만큼은 영원하다’는 말을 남겼다. 희망은 아직 충분하게 의식되지 못했지만 더 미래를 갈망하는 것이며, 현재에 대한 실망에서 출발하는 삶의 원리이다. 그리고 희망의 원리는 내일은 오늘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이다. 저 유명한 신곡의 지옥 편에서 “여기 들어오는 자들이여!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고 단테는 말하지 않았던가. 어떤 희망도 없는 곳이 곧 지옥이다.
희망이란 ‘보다 나은 가능한 삶’을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은 현실과 동떨어진 막연한 초월적 낙관이 아니기에 변화를 위한 희망은 그 변화가 필요한 현실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희망은 언제나 현실에서 싹터야 하고 다시 현실에 뿌리내려야 한다. 그래서 “세상에 도움을 주는 무엇을 세상 속에서 발견해 낸다”는 희망의 원리가 필요하다. 우리가 겪는 불안은 특히 자신의 삶이 방향을 잃었다고 생각될 때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된다. 그리고 불안에 대한 두려움과 좌절감으로 인해서 흔히 그리고 쉽게 나타나는 태도가 거친 냉소와 무조건적 불신이다. 하지만 세상을 냉소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대상은 정작 타인이 아니고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신에 대한 불신과 부정의 눈길을 세상의 문제에서 생기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냉소주의의 바탕에서 작동하는 마음에는 무엇보다도 자기혐오와 열등감, 무력감의 얼음덩이들로 가득하다.
희망을 배우는 것이라고 하는 의미는 희망한다는 것이 곧 저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현실에 맹목적으로 순응하지 않는다. 블로흐의 현실은 어느 때도 순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그래서 블로흐는 ‘희망의 내용은 변할 수 있지만 희망의 동인만큼은 영원하다’는 말을 남겼다. 희망은 아직 충분하게 의식되지 못했지만 더 미래를 갈망하는 것이며, 현재에 대한 실망에서 출발하는 삶의 원리이다. 그리고 희망의 원리는 내일은 오늘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이다. 저 유명한 신곡의 지옥 편에서 “여기 들어오는 자들이여!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고 단테는 말하지 않았던가. 어떤 희망도 없는 곳이 곧 지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