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암서원과 의병장 송제민 -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우석대 석좌교수
2022년 09월 26일(월) 00:30 가가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이야말로 조선의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이었고 가장 처참한 민족의 비극이었다. 얼마나 많은 인민들이 죽어야 했고, 조선의 역사와 문화, 모든 문물이 깡그리 파괴되는 불행을 겪어야 했던가. 그러한 비극과 참담한 세상에서, 호남인들의 몸을 던지는 애국과 충렬정신에 의해, 끝내는 망하지 않고 나라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 자랑스러운 호남정신은 죽음의 잿더미와 비극의 불행 속에서 발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충무공 이순신은 나라를 지켜낸 성웅으로서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도 없었다”(若無湖南 是無國家)는 명언을 남길 수 있었다.
나는 엊그제 무등산 자락의 화암동에 위치한 운암서원(雲巖書院)을 방문했다. 숙종 때 창건되었지만 정조 13년에야 활성화되었다. 1789년 정조는 의병장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비참하게 죽어간 충용장 김덕령(1567~1596) 장군을 신원하여 충장공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태어나서 살아갔던 마을을 충효리라고 명명하여 억울함을 풀어서 현양하는 조치를 취했다. 참으로 역사적인 일을 해냈었다. 그러면서 김덕령 장군의 가까운 친척이자 의병 활동을 권유했던 해광 송제민(宋濟民: 1549~1602)에게 의병 활동의 공로를 인정하여 사헌부 지평이라는 벼슬을 증작하고 운암서원을 통해 송제민의 의혼을 현양하도록 하였다. 참으로 늦은 조치였으나 얼마나 뜻있는 일이었던가.
담양 출신이지만 광주에서 세거했던 송제민은 호걸의 용모에 의기가 뛰어났고 높고 깊은 학문으로 당대의 큰 인물로 명망이 높았었다. 토정 이지함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학자로서도 뛰어났으나 임진왜란을 당하여 고경명·조헌·김덕령 등의 의병에 가담하여 많은 전공을 세운 천하의 의기 남아였다. 벼슬도 하지 않고 처사로 살아갔던 이유로 전쟁이 끝나고도 그를 알아 주는 사람이 적었다. 나라에서도 그의 공훈을 인정해 주지도 않았다. 다행히 송제민의 사위인 석주 권필(權필: 1569~1612)의 많은 기록이 남아 있어 그의 공적은 정조 때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알려지는 기회를 맞았다. 당대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문장가였던 권필은 광해군 시절의 패악한 정권을 비판하다 시 한 수 때문에 죽임을 당한 대표적인 참여 시인이었다. 그는 송제민의 딸을 아내로 맞아 장인으로 모셨던 송제민의 일생을 참으로 소상하게 기록하여 남겼다. ‘해광공유사’(海狂公遺事)라는 이 장문의 글은 글도 명문이지만 송제민의 일생을 참으로 자세하게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였다.
‘해광공유사’라는 중요한 자료 덕분에 잊혀진 송제민은 다시 살아나 세상에 빛을 남긴 의병장이자 학자로서 생애가 정확히 알려지게 되었다. 이 글에 의지하여 뒷날 우암 송시열은 ‘해광선생 묘표’를 지어 묘비문을 통해 그의 공훈과 학문적 업적이 소상히 밝혀지게 하였다. 현석 박세채에 의하여 ‘해광선생전’(海狂先生傳)이, 송암 기정익에 의해 ‘해광선생 행장’이 저작되어 세상에서 해광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크고 넓게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권필·송시열·박세채·기정익 등이 누구인가. 대문장가이자 대학자들인 그들의 글로 그 정도의 칭송을 받은 분이라면 당연히 오늘의 모든 국민도 그분의 의혼과 학문적 업적을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하건만, 오늘의 우리들은 너무나 그분에 대하여 알지를 못한다. 무등산의 산자락에 그렇게 우람하게 서있는 운암서원도 알아주거나 찾아보는 사람도 없다. 운암서원의 운암사에는 해광선생을 주벽으로 모시고 임진왜란에 포로가 되어 항복을 거부하고 물에 투신하여 자결한 큰아들 송타(宋 타)와 사위 석주 권필을 배향하고 해마다 춘추로 두 차례 제향을 올린다. 후손들이 온갖 정성을 다해 사우를 지키며 보존하고 있으며 뜻있는 선비들이 함께하면서 이제는 그렇게 초라하지 않게 현양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임진왜란, 나라가 위급하자 호남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고경명·김천일·김덕령·송제민, 얼마나 씩씩했던 의병들이던가. 그들이 앞장서자 호남 전역의 백성들이 일치단결하여 왜적과 싸워 나라와 민족을 지켜내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그래서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는 칭송이 나올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학자 의병이던 해광 송제민을 잊어서야 되겠는가. 나는 이번 추향에 초헌관으로 초대받아 해광 선생의 신위 앞에서 공손하게 엎드려 술 한잔을 올려바쳤다. 그러면서 선생의 의혼을 결코 잊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권필·송시열·박세채·기정익 등이 누구인가. 대문장가이자 대학자들인 그들의 글로 그 정도의 칭송을 받은 분이라면 당연히 오늘의 모든 국민도 그분의 의혼과 학문적 업적을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하건만, 오늘의 우리들은 너무나 그분에 대하여 알지를 못한다. 무등산의 산자락에 그렇게 우람하게 서있는 운암서원도 알아주거나 찾아보는 사람도 없다. 운암서원의 운암사에는 해광선생을 주벽으로 모시고 임진왜란에 포로가 되어 항복을 거부하고 물에 투신하여 자결한 큰아들 송타(宋 타)와 사위 석주 권필을 배향하고 해마다 춘추로 두 차례 제향을 올린다. 후손들이 온갖 정성을 다해 사우를 지키며 보존하고 있으며 뜻있는 선비들이 함께하면서 이제는 그렇게 초라하지 않게 현양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임진왜란, 나라가 위급하자 호남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고경명·김천일·김덕령·송제민, 얼마나 씩씩했던 의병들이던가. 그들이 앞장서자 호남 전역의 백성들이 일치단결하여 왜적과 싸워 나라와 민족을 지켜내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그래서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는 칭송이 나올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학자 의병이던 해광 송제민을 잊어서야 되겠는가. 나는 이번 추향에 초헌관으로 초대받아 해광 선생의 신위 앞에서 공손하게 엎드려 술 한잔을 올려바쳤다. 그러면서 선생의 의혼을 결코 잊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