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다는 것은 - 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2022년 09월 19일(월) 02:00 가가
누군가를 만났을 때 가장 먼저 살펴보게 되는 것이 얼굴이다. 얼굴이 좋아 보인다느니, 얼굴이 더 젊어 보인다느니 등의 말들을 하루에 몇 번씩 듣기도 하며, 관계에 따라서 다양한 표현을 사용할 뿐 본질은 큰 차이가 없다. 의도하거나 계획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안색’을 살피는 것이다. 이는 서로를 염려하고 배려하는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얼굴 보기’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뜻한다. 사실 서로에게 서로의 얼굴을 보는 일이 얼마나 특별하며 의미 있는 일인가. 다만 우리가 얼굴을 본다는 것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은 것 뿐이다.
너무 평범하게 들릴 수 있는 얼굴 마주 보기에 아주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얼굴이 곧 인간관계의 근본적 조건이라고 말하는 철학자가 있다. 리투아니아 출신의 유태계 프랑스 사상가 에마뉘엘 레비나스(1906-1995)다. 그에 따르면, 얼굴이야 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지속되고 반복되는 관계 맺기의 핵심 개념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관계란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이며, 느끼는 것이고 보고 느낀 것에 대해서 서로 답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레비나스의 삶을 들여다 보면 그가 왜 얼굴을 철학적 개념으로 끌어올렸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레비나스는 1906년 리투아니아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나서 프랑스 대학에서 공부한 프랑스인이다. 그러나 그의 형제들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 과정에서 희생되었고 자신 또한 전쟁 포로로 강제 노동을 했다. 전쟁에서 겪은 이 고통스러운 경험이 타자에 대한 철학적 바탕이 되었다.
타자는 어떤 조건을 전제하든 ‘나’라고 부르는 우리의 무리에 끼지 못하고 밖에 있는 ‘다른 사람’, 얼굴 없는 존재다. 우리는 주저 없이 우리 밖에 있는 타자적 존재에게 어떠하며, 어떠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규정하고 판단한다. 타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으므로 어떤 생각과 감정이 있는지 알 바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주체적이고 지배적인 ‘나’는 어떻게 구성되며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게 되는가? 나와 타자의 사이를 뒤집으면 답이 보인다. 나 자신이 곧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존재하는 것이. 이 타자의 얼굴을 레비나스는 관계의 핵심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타자는 밖에 있는 하찮은 것, 우리를 귀찮고 성가시게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항상 우리 삶에 관여하며,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게 만드는 조건인 것이다. 모든 존재는 우선 얼굴을 통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드러낸다. 얼굴은 지금 겪고 있는 비참과 슬픔, 가난과 고통, 두려움과 아픔이 드러내는 실체적이고 구체적인 장소다. 그리고 타자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타자의 고통과 상황에 응답한다는 의미다. 윤리는 곧 본다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흔히 얼굴을 보면 차마 독하게 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는가. 좀 더 적극적인 맥락에서 어느 철학자 역시 “인간이 자신을 드러내고 의사소통을 나누는 ‘얼굴’은 가장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장소”라고 말한다.
지금 우리는 어떤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가. 얼굴을 마주 보며 드러나는 요청에 귀를 여는 관계를 맺고 있는가? 불행하게도 관계의 편리성과 필요는 빈틈 없이 챙기지만, 타자의 얼굴은 외면하는 것에 이미 오래 전부터 익숙한 것은 아닌가 싶다. 얼굴을 본다는 것은 책임과 연결되는 상호적 의미이며, 이 관계야말로 타자를 향한 철저한 무관심과 ‘자폐적’ 무지의 동굴을 벗어나는 것이다. 또 이는 개인이 독단적으로 휘두르는 자유와 정의가 얼마나 폭력적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윤리적 실천이다. 이런 뜻에서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은 관념적, 위계적인 관계이자 지배의 구조를 넘어서 인간회복적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이 타자인 ‘너’를 통해서 내가 누리는 자유와 힘의 한계를 깨닫고, 누군가를 ‘얼굴 없는 타자’로 규정하는 폭력을 멈추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에게 오직 우리만 있는 것은 아닌가 스스로 묻자. 주변 누군가에게 얼굴 없는 사람으로서, 보이지 않고 소리도 억압된 채로 우리의 비대해진 주체성과 과잉의 자유를 위해서 박제된 삶을 살기를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자.
타자는 밖에 있는 하찮은 것, 우리를 귀찮고 성가시게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항상 우리 삶에 관여하며,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게 만드는 조건인 것이다. 모든 존재는 우선 얼굴을 통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드러낸다. 얼굴은 지금 겪고 있는 비참과 슬픔, 가난과 고통, 두려움과 아픔이 드러내는 실체적이고 구체적인 장소다. 그리고 타자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타자의 고통과 상황에 응답한다는 의미다. 윤리는 곧 본다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흔히 얼굴을 보면 차마 독하게 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는가. 좀 더 적극적인 맥락에서 어느 철학자 역시 “인간이 자신을 드러내고 의사소통을 나누는 ‘얼굴’은 가장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장소”라고 말한다.
지금 우리는 어떤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가. 얼굴을 마주 보며 드러나는 요청에 귀를 여는 관계를 맺고 있는가? 불행하게도 관계의 편리성과 필요는 빈틈 없이 챙기지만, 타자의 얼굴은 외면하는 것에 이미 오래 전부터 익숙한 것은 아닌가 싶다. 얼굴을 본다는 것은 책임과 연결되는 상호적 의미이며, 이 관계야말로 타자를 향한 철저한 무관심과 ‘자폐적’ 무지의 동굴을 벗어나는 것이다. 또 이는 개인이 독단적으로 휘두르는 자유와 정의가 얼마나 폭력적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윤리적 실천이다. 이런 뜻에서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은 관념적, 위계적인 관계이자 지배의 구조를 넘어서 인간회복적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이 타자인 ‘너’를 통해서 내가 누리는 자유와 힘의 한계를 깨닫고, 누군가를 ‘얼굴 없는 타자’로 규정하는 폭력을 멈추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에게 오직 우리만 있는 것은 아닌가 스스로 묻자. 주변 누군가에게 얼굴 없는 사람으로서, 보이지 않고 소리도 억압된 채로 우리의 비대해진 주체성과 과잉의 자유를 위해서 박제된 삶을 살기를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