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하루-황 성 호 신부, 광주가톨릭 사회복지회 부국장
2021년 12월 24일(금) 02:00 가가
이른 아침에 일어나 옷을 갖춰 입고, 걸어서 5분 거리인 성요한병원에 아침 미사를 드리러 간다. 바람이 제법 매섭다. 임동 주교좌성당 앞, 거대 괴물 같은 40층 높이의 아파트가 우뚝 서 있는데 마무리 공사 중인지 일꾼들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총총걸음으로 아파트 건설 현장으로 들어간다. 미사를 마치고 요한병원을 나설 때면 태양이 대지를 비추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버스를 기다린다. 도로 위의 자동차들은 점점 늘어나 바쁘게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임동 주교좌성당 현대유치원 앞은 아이들을 등원시키려는 부모들의 차량으로 붐빈다. ‘모두가 하루를 시작하는구나!’라고 속삭이며 숙소로 돌아오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두에게 주어진 하루는 누구에게나 똑같은 하루일 것이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이 하루가 어떤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며, 어떤 일을 하고 있고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느냐에 따라 다른 하루가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같은 하루지만 어느 누군가에게는 다른 하루라는 것이다.
다른 하루라는 말 안에 기득권의 횡포가 있고, 우월 의식을 갖는 이들의 차별과 냉대가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같을 수 없는 하루를 말하는 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생각하는 하루는 같지 않다. 사회복지를 실현해 나가는 복지사와 복지 대상자들의 하루도 같지 않을 것이다. 합법과 불법이라는 규정에 등록 이주 노동자와 미등록 이주 노동자의 하루도 같지 않다.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시작하는 하루와 가족과 사회로부터 변방으로 밀려난 독거노인, 노숙인, 고아, 장애인, 이주민, 난민의 하루도 다를 것이다. 안락한 집에서 따뜻한 식사를 하며 시작하는 하루와 보일러조차 틀지 못하고 굶으면서 시작하는 하루도 같지 않다.
우리의 존재는 소중한 존재이다. 그래서 당연히 사랑받아야 하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소중한 존재성을 지닌 우리는 어떤 생각과 마음, 직업, 처한 환경에 의해 변질될 수 없다. 그런데 천박한 자본주의와 불명확한 가치 평가를 통해 누구에게나 주어진 하루가 다르다는 것이다.
같은 하루를 주제로 말하고 싶은 이유는 모두가 맞이하는 하루이기 때문이고, 그 하루를 맞이하는 모두가 기쁘게 살아야 할 기본적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제 논리와 끝없는 욕심은 같아야 할 하루를 다른 하루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 세상이 점점 탐욕으로 어둠으로 치닫고 있는 것을 아셨는지 예수는 마태오복음 5장 45절에서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십니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자비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다. 그런데 우리의 판단은 끊임없이 저울질하면서 숨 가쁜 거래를 하는 것 같다. 분명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는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준 것에 대한 그 대가를 끊임없이 원한다. 합당한 대가를 받아야 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하고 원초적이며 근본적인 우리 존재가 받아야 할 천부인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인권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함부로 침해할 수 없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가 성실하거나 불성실한 것에 상관없이, 또 악인이나 선인에게도 주어지는 무상의 선물이다.
최근 시리아 난민 친구를 만났다. 그의 가족은 기본적 인권이 짓밟힌 것은 물론, 생명 유지를 위한 어떤 생활도 할 수 없었다. 피신하기 위해 가족이 함께 탔던 차량에 포탄이 떨어졌고 그 자리에서 둘째 형이 죽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한쪽 다리를 잃었다. 한참 뛰놀고 공부할 나이 어린 이 친구는 현재 가족을 위해 공장에 다니고 있다. 어떤 이념과 사상, 그리고 종교적 신념이 사람에게 주어진 권리를 박탈할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의 논리는 너무나도 쉽게 소중한 존재인 우리를 짓밟으면서 함부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같은 하루를 살 수 있겠는가?
오늘도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하루를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런데 모두가 같은 행복한 하루를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같은 하루를 주제로 말하고 싶은 이유는 모두가 맞이하는 하루이기 때문이고, 그 하루를 맞이하는 모두가 기쁘게 살아야 할 기본적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제 논리와 끝없는 욕심은 같아야 할 하루를 다른 하루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 세상이 점점 탐욕으로 어둠으로 치닫고 있는 것을 아셨는지 예수는 마태오복음 5장 45절에서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십니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자비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다. 그런데 우리의 판단은 끊임없이 저울질하면서 숨 가쁜 거래를 하는 것 같다. 분명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는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준 것에 대한 그 대가를 끊임없이 원한다. 합당한 대가를 받아야 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하고 원초적이며 근본적인 우리 존재가 받아야 할 천부인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인권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함부로 침해할 수 없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가 성실하거나 불성실한 것에 상관없이, 또 악인이나 선인에게도 주어지는 무상의 선물이다.
최근 시리아 난민 친구를 만났다. 그의 가족은 기본적 인권이 짓밟힌 것은 물론, 생명 유지를 위한 어떤 생활도 할 수 없었다. 피신하기 위해 가족이 함께 탔던 차량에 포탄이 떨어졌고 그 자리에서 둘째 형이 죽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한쪽 다리를 잃었다. 한참 뛰놀고 공부할 나이 어린 이 친구는 현재 가족을 위해 공장에 다니고 있다. 어떤 이념과 사상, 그리고 종교적 신념이 사람에게 주어진 권리를 박탈할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의 논리는 너무나도 쉽게 소중한 존재인 우리를 짓밟으면서 함부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같은 하루를 살 수 있겠는가?
오늘도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하루를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런데 모두가 같은 행복한 하루를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