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수’와 ‘봇카’
2021년 12월 02일(목) 02:00
세상에는 수많은 직업들이 있다. 한 때 인기를 누리다가 지금은 사라져 버린 직업이 있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롭게 등장하는 직업도 많다.

오래 전 책에서 ‘전기수(傳奇수)’라는 단어를 발견했을 때 궁금증이 일었다. 이승우의 단편소설 ‘전기수 이야기’에 등장하는, “전기수? 그게 뭐야? 전기 기술자를 줄인 말인가? ”라는 글귀처럼 난생 처음 들어본 단어가 흥미로웠다. ‘기이한 이야기를 읽어주는 늙은이’를 뜻하는 ‘전기수’는 조선시대 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다리 밑이나 시장·거리에서 ‘심청전’이나 ‘숙향전’ 등 재미난 이야기책을 읽어주던 직업적인 이야기꾼이다. 소설을 읽다 결정적인 대목에서 갑자기 멈춰버리기도 했는데, 못내 뒷이야기가 궁금한 사람들이 돈을 던지면 이야기를 계속했다고 한다.

언젠가 김애란의 ‘칼’이라는 단편소설을 배우들이 읽어주는 걸 들으면서 낭독이 주는 감동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그걸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현대판 전기수’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세계로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광주극장에서 상영 중인 다큐멘터리 ‘행복의 속도’에 나오는 ‘봇카’라는 직업은 내 삶의 속도를 생각해보게했다. 이한혁 감독이 제작한 영화의 배경은 ‘해발 1500미터 천상의 화원’으로 불리는 일본의 오제국립공원이다. 일본의 옛 직업인 ‘봇카’는 걸어서 짐을 운반하는 사람을 뜻하며,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오제 국립공원에서만 만날 수 있다. 오제는 자연보호를 위해 차가 다닐 수 없어 산장에 필요한 식자재 등을 조달하기 위해 봇카가 필요하다.

사진찍기를 좋아하는 24년차 봇카 이가라시와 일본청년봇카대 대표이자 9년 차 봇카인 이시타카는 매주 6일간 평균 70~80kg에 달하는 짐을 8~12㎞ 떨어진 산장에 배달한다. 나무로 만든 지게 위에 자신의 키보다 훨씬 높게 짐을 쌓고, 팔장을 낀채 앞만 보며 묵묵히 걸어가는 봇카의 모습에선 ‘자신의 페이스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귀함을 만나게 된다.

꽃과 나무, 바람과 새, 습지의 식물 등 오제의 사계와 아름다운 기타연주가 어우러진 풍경은 영화가 주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김미은 문화부장 me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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